1. 억압과 독단과 불관용에 맞서 싸우며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 본성에 관한 정치(精緻)한 분석을 통해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인간과 신이 소통하는 세상을 구가하고자 했던 스피노자,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가이자 네오휴머니즘의 구현자이다. 그는 학문적 영역에로 철수하여 세계를 단지 해석만 하는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사변과 실천, 철학과 정치학의 통섭을 통하여 ‘다중’의 구성적 역량을 증대시킴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전력투구한 철학자의 한 예로서 오래 기억될 것이다.
2. 스피노자의 통섭적 사유체계는 근대적인 동시에 탈근대적이며, 전체 존재계에 대한 포괄적?직관적 통찰인 동시에 개체의 완전한 인식이고, 실체와 양태의 필연적 관계성에 대한 완전한 통찰임을 보여준다. 근대성의 정초를 대안적 방식으로 제시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의 사상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두 영역의 조화를 강조한다. 그의 정치적 자유 개념은 공화주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녔으며, 자연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을 통해 정념을 극복하고 정신의 능동성을 키워나가는 것이다. ... 레오 스트라우스는 스피노자를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철학자로서 근대 정체(政體)를 정초(定礎)한 인물로 평가한다.
3. (스피노자의 대표작) [에티카]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신 또는 자연(Deus sive Natura)’의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과 사랑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자유와 긍정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게 되는 것은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충만할 때이며, 그러한 사랑은 자연의 합리적 질서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나온다. 그런데 참된 인식을 위해서는 ‘신 또는 자연’이라고 부르는 실체의 본성과 구조를 파악해야 하므로 형이상학 체계를 포함해야 하고, 지성에 기초한 올바른 인식이 선행되어야 하므로 인식론을 포함해야 하며, 정념의 예속에서 벗어나야 하므로 심리학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하여 윤리학 및 도덕철학[정치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최고의 인식 유형인 제3종의 직관지(直觀知)는 전체 존재계에 대한 포괄적?직관적 인식이며 개체의 완전한 인식이고 실체와 양태의 필연적 관계성에 대한 완전한 인식이다.
4. 스피노자 사상과 현대 과학의 생명사상과의 접합은 전일적 우주에 대한 통찰에서 드러나며, 생명의 ‘자기조직화’ 원리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폐기된 창조성의 원리로서 생명의 전일성과 자기근원성을 본질로 삼는다. 스피노자의 사상과 철학은 우리 삶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인식의 빈곤 상태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말하여 준다. 무지와 망상, 분노와 증오, 갈망과 탐욕, 시기와 질투, 교만과 불신 등이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마야의 장막이다. 그 어떤 고통이나 두려움도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의 정신체, 감정체가 지닌 색상에 의해 채색되고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 본성과 감정의 힘에 관하여 논증하며 의식의 이행을 통한 참된 인식의 긴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5.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범신론은 만물이 개별의 이(理)를 구유하고 있지만 그 개별의 ‘이’는 보편적인 하나의 ‘이’와 동일하다는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명제와 일맥상통한다. 또한 이일(理一)과 분수(分殊)를 통체일태극(統體一太極)과 각일기성(各一其性)으로 명쾌하게 설명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있는 보편성과 특수성, 전체성과 개체성의 합일을 표징하는 것이다. 스피노자 사상의 현대적 부활은 그의 철학체계 속에 나타난 신, 자연, 인간 그리고 자유와 행복에 대한 그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며, 그의 사상으로부터 오늘날에도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1세기 대안문명 건설의 단초가 거기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6. 스피노자의 체계에서 관념의 적합성은 지성에 비례하며 신의 무한 지성에서 극대화된다. 적합한 관념을 늘려간다는 것은 신의 무한 지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이고 인식 및 이해 수준이 높아지는 것이어서 현상의 배후 원리를 통찰할 수 있게 되므로 세상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진정한 자유와 지복(至福)의 삶을 구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대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는 의식하지만 그 행위를 결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유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고 본다. 예컨대, 젖먹이가 젖을 욕구하는 것, 성난 아이가 복수하려는 것, 겁쟁이가 도망하려는 것, 술주정뱅이가 횡설수설하는 것, 미치광이?수다쟁이?아이들의 충동적인 언행 등이 정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이러한 정신의 결정이란 것이 한갓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신체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정신의 결정[충동]과 신체의 결정이 본성상 동시에 일어나며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고 말한다.
8. 스피노자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욕망의 세 가지 감정에서 파생되는 수십 가지의 감정―즉 욕망, 기쁨, 슬픔, 경탄, 경멸, 사랑, 증오, 애호[호감], 혐오, 헌신, 조롱, 희망, 공포, 안도(安堵), 절망, 환희, 회한[낙담, 양심의 가책], 연민[동정], 호의, 분노, 과대평가, 과소평가[멸시], 질투, 동정, 자기만족, 겸손, 후회, 오만[교만], 소심[自卑], 명예, 치욕, 동경, 경쟁심, 감사, 자비심, 분노, 복수, 잔인[잔혹], 겁[두려움], 대담[용감], 소심, 공황[당황], 공손함, 명예욕, 탐식, 음주욕, 탐욕, 색욕 등 48가지―을 연역적 형식으로 정밀하게 기하학적 심리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는 것, 또는 선택하거나 판단하는 것은 자기보존의 노력에 의해 추동되며 동시에 자기실현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추구하거나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기쁨을 가져오고 자기실현의 힘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것을 회피하는 것은 그것이 슬픔을 가져오고 자기실현의 힘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의식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무엇이 유용하고 유용하지 않은지, 무엇이 더 좋고 더 나쁜지, 무엇이 최선이고 최악인지를 각자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는 것이다.
9.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기보존의 욕구에 휘둘려 정념에 빠지면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판단이 각자의 정념에 근거하지 않고 적합한 인식에 근거할 경우 개인과 공동체의 조화력이 회복되므로 개인의 자기실현의 힘 또한 증대되게 된다. 감정을 완화하고 억제하는 인간 역량의 결여를 스피노자는 예속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감정에 종속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닌 운명의 지배하에 있으며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알지만 종종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되는 만큼 운명의 힘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그 자신의 본성 안에서 고찰될 때는 완전하다거나 불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영원한 질서와 자연의 확고한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특히 그러하다.
10. 최고의 선(善)은 최고의 유익한 것이며 이는 곧 신에 대한 인식이다. 이러한 인식 단계에 이르면 외물(外物)에 대한 예속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이성에 의한 자기보존이 가능해지고 사리(私利)는 공리(公利)에 연결된다. 말하자면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실현되는 것이다. 자유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자기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행동하는 자를 일컫는 것이다. 자연 안에는 무수히 많은 코나투스, 즉 자기보존의 노력이 있다고 언급한다. 개체성을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들이 상호 대립하고 지속적으로 투쟁하며 인과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자신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들에 대항하고, 정신은 자신의 행위 역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1. 덕 있는 사람, 즉 자유인은 슬픔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도록 더 강한 기쁨의 감정을 유발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자이다. 그 방법이란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전체 존재계와의 관계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해하고 총체적 진리를 통찰함으로써 슬픔이란 것이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피할 도리가 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정념을 완전히 이해하면 감정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게 되므로 우리의 삶은 능동적인 것으로 변한다. 스피노자의 체계 속에서 덕, 능력, 이성, 적합성[타당성], 능동성, 자유, 행복은 동일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스피노자가 감정의 스펙트럼을 인식의 영역과 결부시켜 정밀하게 다룬 것도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정념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을 도덕적 성장에 필요한 과정으로 이해를 하는 사람은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므로 모든 경험을 지성의 계발을 가져오는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2. 스피노자의 철학은 인간 감정의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감정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고 나아가 긍정적인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준다. 이성의 명령에 따라 생활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신적 본성의 필연성에서 생겨나고 자연의 영원한 법칙과 규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기 때문에 미워하거나 조소하거나 경멸할 만한 것도, 연민을 느낄 만한 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13. 우리가 갖게 되는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경험하는지를 적확(適確)하게 지각할 때 부분적이고 우연적이며 수동적인 인지는 전체적이고 필연적이며 능동적인 통찰과 이해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정을 더 잘 인식할수록 그만큼 감정은 우리의 통제 하에 있게 되고, 또 정신은 그만큼 감정의 영향을 덜 받는다.” ... 스피노자는 “감정에 대한 참된 인식에 근거하는 치료법보다 더 탁월한 치료법은 우리의 능력 속에 없다. 왜냐하면 정신은 적합한 관념을 사유하고 형성하는 능력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한다.
14. 스피노자에 의하면 ... 최고의 인생이란 (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자 사랑으로서의) 직관지를 가지고 자연의 필연적 법칙성을 이해하며 주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함으로써 지고의 자유와 행복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그는 자유를 추동해내는 지성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조화적 질서의 유지와 보편적 자유의 실현을 위해 공동의 법에 기초한 민주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국가란 법과 자기보존의 능력에 의해 확립된 사회이며, 시민이란 국가의 법에 의해 보호되는 이들이다. 스피노자는 대중의 자율성과 능동성 그리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비이성적이고 덕이 없는 국가로서 부도덕과 무질서와 불복종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15. 스피노자에게 민주주의란 단순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아니라 정치적?법적 상태로서 도덕적?실천적 과제인 동시에 정치적 최고선이었다. 근대국가가 태동하던 격랑의 시기에 그가 철학적 사변에 머물지 않고 도전적인 정치 현안에 응답하며 개개의 인간 본성에 주목하여 전복적인 새로운 방향을 정초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16. 스피노자의 경우 자연 상태에서 국가 상태로의 이행은 기본적 안전은 물론 이성적 삶과 보편적 자유의 실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홉스와 차별화된다. ... [정치론]에서의 자유는 특히 정치공동체적 요소와 강하게 결부되어 나타난다. 즉 시민의 자유는 국가의 안전과 관계되고, 국가의 안전은 훌륭한 법률과 제도에 의해 보장된다는 것이다. 시민의 덕성이 충만하고 정치지도자가 절제와 지혜의 덕을 발휘하여 자신의 책무를 다할 때 로마가 번성했던 것처럼, 스피노자의 체계 속에서도 덕과 법제도는 지복(至福)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17. 1960년대 말 이후 스피노자 연구의 르네상스는 20세기 후반 프랑스 구조주의(또는 포스트구조주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부되면서 구조주의 운동의 철학적 기초를 제시하고 그 쟁점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크 데리다, 미셸 푸꼬,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자크 라캉, 롤랑 바르트,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근대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형성한 인식의 주체, 사유의 주체로서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아의 진리관을 거부하고 주체의 해체를 통해 주체와 객체의 명확한 구분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었다. ...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의 해체는 실체와 양태의 일원성에 기초한 스피노자의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스피노자 역시 오직 인간 행위가 능동인 경우에만 자유이고 현실적 주체인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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