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쓴 동기는, 전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니체가 19세기 말 독일사회에 대해 말할 때처럼 나쁜 공기가 이 사회를 휩싸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회현상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사유를 하는 자도 이 나쁜 공기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다. 왜 우리의 소중한 생명이 국가에 의해, 정부에 의해, 무엇보다도 우리 이웃에 의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 의해 이처럼 비루하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묻고자 했다.” - 저자의 말 -
왜 우리의 소중한 생명이 이토록 비루하게 취급되는가
“매일 두문불출하고 어쩌다 나가게 되면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누가 기침이라도 하면 흘겨 보며 피한다. 그렇게 보낸 2개월. 누군가가 말하길 ‘메르스는 진정되고 있으니 안심하시오’란다. 나는 아무 일 없어 다행이다? 되뇌며 다음 경마 시합으로 넘어간다. 이 반복되는 불행한 순환에서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생명과 타인에 대한 우리의 태도인가? 시스템의 문제인가, 정치의 문제인가? 심지어 역사의 문제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우리 삶의 토대 자체가 문제되는 상황인가?”
이 책은 왜 우리의 소중한 생명이 국가와 정부에 의해, 우리의 이웃과 우리 자신에 의해 이처럼 비루하게 취급되어야 하는지 묻는다. 이를 위해 저자는 생명철학에 관심을 가지며 천착해 온 베르스손, 콩트, 캉기옘, 시몽동 등을 호출한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메르스 못지않게 심각한 질병에 걸려있다. 무엇보다 큰 비극은 생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인간 자신의 비루한 태도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는 희대의 생명 모욕 사건
책을 시작하며 저자는 오이디푸스가 육신의 눈을 찌른 후 철학자들이 무심했던 생명에 주목한다. 오랜 세월 생명은 무관심의 대상을 넘어 저급한 종류의 실재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생명은 철학자들이 그처럼 소중히 여기는 반성적 사유, 내면적 사유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진화의 우발성은 생명의 운명을 자신이 스스로 감싸서 스스로를 감당하는 존재로, 내재성을 가진 존재로, 반성적 사유를 하는 존재로, 영혼을 가진 존재로 인도한 것이다. 영혼은 몸과 함께 태어나 몸과 함께 울고 웃는다. 몸과 더불어 자신을 감당하고 몸과 더불어 기쁨을 창조한다. 고통과 환희라는 정념은 외부에서 들어오기도 하지만 스스로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몸이라는 지주를 통한다. 인간처럼 신경계가 발달한 고등동물의 특이성은 고통에 대해 더 취약하다는 점이다. 내면을 가진 생명체는 자극이 내부에서 공명되고 확대되어 자기만의 느낌을 가진다. 게다가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다. 그래서 생명의 느낌은 전파된다, 전염된다. 베르그손은 직관과 공감을 말했고 시몽동은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집단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그 정신적, 집단적 특징으로 인해 한없이 고통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생명이 가진 미덕들이다.
책에 따르면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는 이런 생명의 모든 미덕에 반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생명을 발가벗기고 능멸하고 쓰레기통에 던져 놓고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도 불가능하게 만든 희대의 생명모욕 사건이다.
자유, 평등, 박애 실천의 주체가 통제의 대상인 군중으로
메르스 사태가 사회문제로 인지된 것은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의 일, 그것도 국가의 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배의 침몰과 외부 바이러스의 침투라는 현상 자체는 자연적으로 일어날 개연성이 있는 사건들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을 어이없게 하고 분노하게 했던 것은 그에 대한 대비와 수습에서 드러난 국가의 무기력과 무관심이다.
우리는 국가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국가는 생명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적어도 원리적으로 국가는 근대 체제에 기초해 있고 근대적 국가 체제는 시민사회에 모델을 둔 사회계약설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저자의 통찰에 따르면 관료주의가 정착하면서 개인은 집단의 일원으로서, 산업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각종 규범들의 실행자로서만 존재한다. 한때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을 실천할 주체로서의 인간은 증발하고 조직화된 군중, 통제의 대상으로서의 군중만이 남았다. 역사가 인간의 열정을 박제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은? 국가는 생명을 거대한 관료행정의 몇몇 구석에 고이 모셔놓았다. 마치 보호구역에 감금한 인디언처럼.
사회유기체도 질병을 앓는다
콩트가 사회유기체란 말을 처음 사용하면서 노린 것은 질병의 사례를 사회에 적용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 때문이다. 유기체는 물체와 달리 질병을 앓는다. 그렇다면 사회유기체의 질병은 어떻게 치유할까? 콩트는 엘리트 관료가 지배하는 테크노크라시를 꿈꾸었다. 유능한 관료들이 과학기술을 도입하여 합리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메르스 사태에서 정부가 할 일은 분명하다. 신속한 초동 대처, 확진자와 감염 의심자의 엄격한 격리 조치, 메르스 바이러스와 병원에 대한 적절한 정보 제공 등등. 하지만 우리의 경우 초기대응에 완전히 실패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감추려 하는 등 지도층의 무책임과 전근대적 비합리성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그렇다면 문제는 합리화된 체계의 결핍이나 불완전한 근대화일까? 저자에 따르면 콩트가 유기체론에서 놓친 것은 유기체의 규범은 사회적 규범과 달리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캉기옘이 내재적 규범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유기체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면서도 그것을 스스로 조절하는 역량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단순히 쾌락과 고통의 계산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생명에 고유한 상태가 있음을 말한다. 고통의 원인이 생명체를 파국으로 몰아가지만 않는다면 생명체는 새로운 규범을 세움으로써 고통을 그럭저럭 해결한다. 이것이 생명체의 내재적 ‘정상화’ 과정이다. 아무리 발달된 의학이라도 생명체의 이러한 규범성이 없다면 그것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철학자인 저자는 우리 사회가 내재적 정상화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가 병이 깊다고 진단한다.
메르스가 병인가, 우리가 병인가?
유기체는 언제나 어느 정도는 질병을 안고 산다. 하지만 저자의 진단에 따르면 우리 상태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볼 때에도 건강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유기체는 신체가 고통받을 때 자신이 비정상임을 안다. 바로 이 느낌을 가지고 외부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모습은 총체적 난맥상이었다. 대통령에서 해당 부서 공무원들에 이르기까지 행정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이를 감독하고 견제할 언론과 정치도 마비상태였다.
게다가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도와주거나 공감하기는커녕 그들을 모욕하거나 고립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다양성과 차이를 지닌 존재이며 고통에 대한 자연적 공감을 갖는다. 위기상황이 아니라면 맹목적으로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인간의 비루함을 무기로 해서 지지자들을 결집하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혐오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비루함의 정치학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모한 반응, 무신경한 태도, 무감각이다. 이런 감정의 작동불능상태는 자폐증에서나 보이는 증상이다. 그래서 저자는 묻는다. 메르스가 병인가, 우리가 병인가?
피로사회의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제는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고 정치의 부재 또는 과잉의 문제, 혹은 역사의 퇴행에 기인했을 수도 있다. 역시 가장 큰 문제는 특히 타인에 고통에 대한 무관심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들이 상호 악순환을 이어간다. 저자가 보기에 비극 중의 비극은 생명을 가진 인간에 대한 인간 자신의 비루한 태도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절에서는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펼친 논의를 실마리로 우리에게 고통에 대한 공감이 퇴색한 이유를 찾고 대안을 모색한다. [피로사회]에서는 신경증적 자아들의 긍정성 과잉과 자기착취로 현대사회를 진단한다. 그리고 삶의 서사성을 회복해 ‘고상한 문화’(니체)를 이루던 바탕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중단의 부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마구 밀고 들어오는 자극에 대한 저항’, ‘아니라고 말하는 주체적 행위’, 막간의 휴식, 무위의 힘 같은 것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대안에 회의적이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자기착취가 자유가 아니라 강제인 탓이다. 알몸 상태에서 신자유주의로 내몰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자들에게는 벼랑으로 떨어질 자유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의 해법은 우리가 익히 듣던 기초이자 원칙론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미완의 민주화를 완성해야 하고 도덕감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로사회]에서 말하는 저 숭고한 부정의 윤리학도 이런 기초 위에서나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