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존재와 본질이 무엇인지 정말로 파악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도 그 신앙(체험들) 속으로 들어서는 일을 비켜갈 수 없다. 나는 이 시대 많은 사람이 비평적으로 식별하면서도 동시에 신뢰 가득 찬 열린 자세로 실제 예수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머리말」중에서
열 처녀의 비유는 연대성과 호의, 관용에 관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것, 곧 놓쳐 버린 때kairos, 닿지 못한 시간에 관한 것이다. 교회의 역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자주 자신의 때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보여 준다. 그럼으로써 문은 닫히고, 그 문은 금방 다시 열리지 않는다. 동일한 체험을 이미 예수님도 겪으셔야 했다. 당시 하느님 백성 대부분이 하느님께서 행동하시는 결정적인 때를 알아보지 못했다. 결과는 끔찍했다. 열혈당원들과 광신주의자들이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다 역사의 조종자들이 되었다. 예루살렘은 파괴되었다. 그것은 놓쳐 버린 역사의 순간이었다.
---「1장 이른바 역사적 예수」중에서
예수님의 이 ‘오늘’이 나자렛에서만 걸림돌이 된 게 아니다. 다른 많은 이도 예수님의 선포 앞에서 고개를 흔들며 말하곤 했다. 그래도 세상은 여태껏 그랬듯 잘 돌아갈 거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잖아! 그러니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했다고는 할 수 없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아니, 무엇인가 변했다!”라는 것이다.
---「2장 하느님 다스림의 선포」중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능으로 다시 숨 쉬고 자유롭게 되고 신뢰를 회복할 수 있게 될 때, 악의 지배는 무너지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분명하게 손에 쥘 수 있는 모습으로 여기 와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세상 폭풍우처럼, 하늘에서 우주적인 광경이 연출되듯 그렇게 도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라나는 씨앗처럼 세상 속으로 들어온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치유의 행적들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져오는 오늘을 이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2장 하느님 다스림의 선포’ 중에서, p63
시몬과 다른 제자들은 토라를 배우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예수님처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도 그들의 생각과 계획, 구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이나 계획을 거슬러, 어쩌면 경건한 삶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마저도 거슬러 예수님을 따르도록 부름 받는다. 그것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다른 낯선 의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낯선 의지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읽었던 것이다.
---「5장 나를 따르라는 부르심」중에서
청중이 날마다 경험하는 세계를 소재 삼아 예수님은 도래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묘사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닌 본질 자체를 명확히 하신다. 곧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지금, 누구나 아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자신의 주변 한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묵시주의적인 천둥 번개를 동반한,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하느님의 엄청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다. 겨자씨가 자라나듯, 그렇게 오고 있다.
---「7장 예수님의 비유」중에서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세리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유다이즘의 시각에서 보면, 세리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 그들은 도둑이고 강도였다. 토라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해서는 안 되었다. 성대한 식사 전에 발을 씻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스승이고 주님이라고 불리는 분이 식탁에 함께한 이들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종이나 하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의 수많은 작은 몸짓과 표징이 여전히 당대 세계의 문화에 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미 기존의 관행을 깨뜨린다.
---「8장 예수님과 표징 세계」중에서
예수님의 기적에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분의 기적은 늘 다른 이들, 결코 당신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오롯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향한 행동이다. 치유와 구마 기적들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풍랑을 가라앉히시고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들도 그렇다. 예수님 당신 자신을 위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다.
---「9장 예수님의 기적」중에서
스스로를 파멸시킬 만한 사회적 위기가 가져오는 절규가 당시 하늘까지 닿았다. 예수님은 이 위기를 명백히 직시하셨다. 가난한 이들이 착취당하는 것을 똑똑히 보셨다. 침묵하신 채 가만 계셔야 하나? “가만! 오, 아직 괜찮군!”이라고 하셔야 하나? 이스라엘 위로 닥쳐오는, 뻔히 보이는 위기 앞에서 단지 하느님의 자비를,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자비만을 선포하셔야 하나? 심판 설교 없는 예수님은 없다. 만일 예수님이 흔들어 깨우지도, 놀라게 하지도, 경고하지도, 엄중한 결과에 대해 말씀하지도 않으셨다면, 나로서는 그런 예수님을 절대 믿을 수 없다.
---「10장 심판에 대한 경고」중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셨던 것은 이상향Utopia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것을 뒤엎는 것이었다. 깜짝 놀랄 만큼 멋지고 지극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유토피아는 아니었을까? 따라서 그분의 전권 주장도 결국 헛되게 소멸하는 것은 아닐까?
---「21장 하느님의 다스림-유토피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