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세계를 반영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언어와 세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언어와 세계는 모종의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공유된 구조가 언어와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 이상의 질문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설사 언어와 세계가 공유하고 있는 구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언어를 사용하여 그 구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언어는 언어-세계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언어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세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이다.(118~119쪽)
《논고》는 (설사 그렇게 이름 붙이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른바 ‘그림이론’과 ‘진리함수론’이라 부를 수 있는 내용의 언어관을 제시하였다. 이 언어관에 따르면, 의미 있는 명제는 경험적 사실에 관한명제들로 자연과학에서 다루는 명제들로 국한된다. 그런데 《논고》에 제시된 언어관과 관련된 명제들은 거의 전부가 경험적 사실에 관한 명제가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명제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명제가 아니고 무의미한 명제들로서 ‘일단 딛고 올라간 후에는 던져버려야 할’ 것들이다. 무의미하지만 언어관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명제들(즉 세계를 올바로 보기 위해 딛고 올라갈 때까지는 필요한 사다리)이며, 일단 그 명제들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귀결은 《논고》의 문장들을 난센스로 이해하게 된다(사다리를 던져버리게 된다)는 것이다.(132쪽)
결국 비트겐슈타인은 하나의 명제가 사실의 그림이 됨으로써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생각 대신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세계에 대해 의미 있게 말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킨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명제는 의미의 원자가 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대신 무수히 많은 명제들의 전체 체계가 세계와 동시에 대응한다는 총체주의적 언어관으로 그의 생각을 전환한다.(157쪽)
비트겐슈타인은 무수히 많은 언어게임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은 없으며, 그러한 언어게임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 단일한 이론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본질적인 답을 얻을 수 없으며 그저 다양한 언어게임들 사이에 가족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내가 어떤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진다면, 직접 그 단어가 사용되는 언어게임에 참여함으로써, 즉 하나의 활동을 실행함으로써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