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휘슬러라는 영국에서 활동한 미국 출신의 화가가 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된 [화가의 어머니]라는 그림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가 그린 [야상곡] 시리즈에는 그의 인상파다운 감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림 속의 런던 시가지와 템스 강은 온통 뿌옇게 색이 칠해져 있는데, 그럼으로써 드라마틱하게 강조되는 것이 안개다. 그 그림들이 얼마나 감각적이었던지, 절친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심지어 휘슬러가 그리기 전까지 런던에 안개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 pp.32-33
“하지만 포피는 아무래도 영국에 있을 때만 숭고하다. 2010년 캐머런 총리 일행이 중국을 방문하려 했을 때, 하필 11월 11일이 방문 기간에 끼어 있었다. 영국 방문단은 양귀비꽃 배지를 관례대로 착용하기로 했는데, 중국 정부가 이를 만류했다. 왜? 중국 입장에서는 양귀비가 아편전쟁의 굴욕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므로 당연히 기분 좋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뜻을 관철했다고 한다. 언론은 이에 대해, 돈 때문에 간 영국 수뇌부가 나름대로 보여준 소극적인 자존심의 표현이었다고 해석했다. 이럴 때 포피는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 p.53
“유럽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경찰은 영국인이고, 연인은 프랑스인이고, 기계들은 독일산이고, 요리사는 이탈리아인이고, 이 모든 것을 스위스인이 관리하고 있더란다. 그런데 지옥엘 갔더니 경찰이 독일인이고, 연인은 스위스인이고, 기계는 프랑스산, 요리사는 영국인, 그리고 이탈리아인이 관리하더란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 유사 버전도 있지만 변치 않는 것은 지옥의 요리사가 영국인이라는 점이다. 영국 요리에 대한 안 좋은 얘기는 유럽에서는 더 악명 높았다. 그러나 원래 입맛이란 주관적인 것이고 또 음식의 맛은 값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영국만큼 귀족 문화가 발달했던 나라도 흔치 않으니 더더욱 쉽게 얘기할 수만은 없다.” --- p.56
“《댈러웨이 부인》에 비견되는 중국어 소설로 타이완 소설가 바이셴융白先勇의 《타이베이 사람들臺北人》이란 작품이 있다. 작가가 젊은 시절 모더니즘에 탐닉했었기에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의 영향이 전혀 없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국민당 군대의 수뇌였던 아버지 바이충시白崇禧 대장의 사교 편력에서 얻은 영감과, 난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전통적 정서가 더해져 전혀 다른 색깔을 보여준다. 그중 [유원경몽遊園驚夢] 편은 왕년에 곤곡昆曲이란 창극의 여배우로 난징 일대의 무대를 주름잡은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다.” --- pp.57-58
“케임브리지에서는 6월 여름 학기 기말고사가 끝나고 시험 성적이 게시되기 전에 학생들이 짧은 축제를 연다. 축제의 마지막 날 ‘메이발(19세기에는 기말고사가 5월에 있었기 때문에 붙였던 이름을 그대로 쓴다)’이라는 무도회는 대개 밤을 지새운 학생들이 ‘생존자들의 사진’이라며 단체 사진을 찍는 것으로 끝이 난다. 더 전통적인 것은 동이 틀 무렵 야회복을 입은 채 배를 타고 케임 강을 거슬러 교외의 그란체스터까지 가서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오는 것이다. 마치 서울의 대학생들이 봄만 되면 경춘선이나 경의선 열차를 타고 일제히 엠티를 떠나듯이 말이다.” --- p.81
“지금도 ‘오차드’의 수수한 함석지붕 카페에서 변함없이 인기를 누리는 먹거리는 밀크티를 곁들인 스콘이다. 밍밍한 맛과 찐득한 식감의 스콘은 ‘영국식 개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보잘 것 없는 메뉴를 쫓아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그란체스터그룹의 면면과 소소한 뒷이야기 그리고 전시된 그들의 옛 사진과 흔적을 더듬으며 역사와 인문의 향기가 서린 스콘을 씹고 밀크티를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 p.85
“강을 감싸듯이 펼쳐진 구릉의 풀밭에는 봄 내내 잔잔하게 꽃망울이 맺혀 있다. 거기에 마치 프랑스 화가 쇠라가 그린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처럼, 피크닉을 나온 사람들이 군데군데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햇살을 즐기는 모습도 야생화 이상으로 전경의 조화에 기여한다. 그냥 부드럽기만 할뻔한 풍경에 인간의 흔적이 더해짐으로써 비로소 한 폭의 생동감 있는 그림이 완성된다.” --- p.87
“엘리자베스 키스는 일본 문화에 굉장한 매력을 느꼈지만, 조선에 와서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조선에 도착한 그녀는 아름답게만 생각했던 일본인들이 저지른 폭력의 잔혹함에 분노를 금치 못한 반면, 조선 민중에 대해서는 두터운 동정심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남녀노소와 신분을 넘나드는 많은 모델과 교감하면서 어느 곳에서보다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래서 그녀는 기존의 서양인 혹은 일본인의 조선 소재 그림에서 나타나는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시선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풍습에 대한 사랑과 경의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었다.” --- p.94
“한국 음주 문화에 익숙한 사람에게 펍은 어쩌면 불친절한 곳일 수도 있다. 펍에서는 술을 마실 때 선불제와 셀프 서비스가 당연하게 여겨진다. 주문할 때는 열 개 남짓 올라와 있는 생맥주 꼭지의 로고를 보고 맥주 유형에 따라 브랜드를 선택한다. 그런 다음 파인트(0.568리터)를 기본단위로 원하는 양을 주문한다. 주문 절차보다 더 낯선 것은 맥주를 받아든 많은 사람이 앉지도 않고 서성거리며 마신다는 점이다. 게다가 서서 마시므로 빨리 마셔버릴 것도 같은데, 대개 한국의 맥줏집에서보다 훨씬 속도가 느리다. 술보다 대화에 더 열중하기 때문이다.” --- p.122
“영국 바깥에서 온 유람객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것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캠퍼스를 통과하는 뱃놀이다. 여기서 놀이용 배는 절대로 ‘보트’라 하지 않는다. 노 대신 삿대를 쓰기 때문에 ‘펀트’라 하고, 뱃놀이도 ‘보팅’이 아니라 ‘펀팅’이라 한다. 배 모양도 일반 보트처럼 앞이 뾰족하지 않고 납작하다. 학교에 다녀오려면 나는 왔다 갔다 두 번 케임 강의 다리를 건너야 했다. 모들린이라는 이름의 이 다리는 도시가 발생하고 도시 이름까지 비롯된 유서 깊은 곳이다. 마침 이 다리는 또 뱃놀이 배가 출발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다리 입구에 접어들 때면 호객꾼이 다가와 점잖게 묻는다. “보팅 하실래요”가 아니라 역시 “펀팅하실래요”이다.” --- p.208
“에든버러로 오기까지 북잉글랜드부터 기차역마다 피어 있던 진분홍빛의 히스 꽃을 이곳에서 진짜야생 상태로 다시 만났다. 그 꽃들은 억새 풀밭 안에 띄엄띄엄 다발지어 만개해 있었다. 히스는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문학적 꽃이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도 ‘히스클리프’ 곧 ‘히스 꽃의 절벽’이다. 사실《폭풍의 언덕》의 무대는 북잉글랜드에 있는 요크의 교외다. 내가 요크에 갔을 때는 이미 히스 꽃이 지고 없어 이런 정서를 느낄 수 없었다. 이 꽃의 꽃말은 ‘고독’이고, ‘Heath’란 말에는 또 ‘황야’라는 뜻도 있다 하니, 브론테가 복수의 화신인 주인공에 이 꽃의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때문이었나 보다.” --- p.185
“18세기 말 영국의 도자 장인 토머스 민튼이 중국산 청화백자의 문양을 본 따 만들어낸 디자인이 큰 인기를 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동판전사銅版轉寫 방식으로 그림이 입혀진 이 도자기는 다른 회사에서도 다투어 카피본을 만들 정도로 향후 200년 동안 사랑받는다. 이 디자인의 도자기들은 중앙에 버드나무 문양이 그려져 있어 ‘윌로우 패턴willow pattern(버들 무늬)’이라 불렸다.”
--- p.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