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우선 ‘정치적’이지만 그 정치적 행동을 이끌어낸 배후에는 반드시 경제적 요인이 잠재해 있다는 의미에서 모든 혁명은 본래 ‘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혁명의 원인에 대한 평가는 또한 바로 이 점에서 여럿으로 갈라진다. 미슐레와 텐을 잇는 일련의 해석에서는 구제도 아래서 농민층이 겪은 극심한 ‘빈곤’이 혁명을 유발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에 반해 토크빌과 조레스 쪽의 생각으로는 이미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버린 ‘번영’의 결실을 제도적으로 독점하려는 부르주아지의 투쟁이 곧 혁명으로 전화된 것이다. 이 ‘빈곤이냐 번영이냐’의 논쟁에 대한 제3의 입장으로서는 마티에, 르페브르, 소불로 이어지는 다소 좌파적 성향의 시각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특히 ‘번영 속의 빈곤’ 내지는 ‘빈곤 위의 번영’을 혁명의 주요 동기로 강조한다. 그렇다. 사회의 한 부분이 온통 번영을 구가하는데, 다른 한 부분은 거기서 제외되거나 그에 의해 희생되어야 한다면, 기껏해야 결핍에 불과하던 이제까지의 빈곤이 이후로는 굴욕으로-이어 굴욕의 폭발로-돌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혁명이란 이와 같이 빈곤만도 번영만도 아닌, 빈곤과 번영이 같이 하는 자리를 발판으로 삼는 법이다. 실로 이 맥락에서 나는 “혁명에는 정규군이 없다”라는 라브루스의 주장에 동의하며, 이것이야말로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1부 시간의 기억, 「1978년 7월 14일」중에서
5월 28일 마침내 혁명은 그렇게 붕괴되고, 코뮌은 또 그렇게 막을 내렸다. 베르사유 정부군은 877명의 사망자를 냈을 뿐이지만, 코뮌의 희생자는 3만이 넘었고 포로는 다시 3만 8,000명을 헤아렸다. 1874년까지 계속된 ‘보복재판’에서 1만 4,000명이 유죄 판결을 받고 총살되거나 투옥되거나 유배(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나 남미의 가이아나까지)되었다. 12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 산 자는 아무도 그 죽은 자의 정확한 수효를 모른다. 혁명을 파괴한 사람은 으레 사상자의 숫자를 감추는 법이다. 그래 그래, ‘그들’도 그랬다. “코뮌을 말살시킨 자들에 대해선 이미 역사가 그들의 목에 두른 칼에 빗장을 걸어버렸습니다. 어떤 성직자의 기도로도 그들에게서 그 칼을 벗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코뮌에 보내는 마르크스의 조사이다. 충혈된 눈으로 프랑스의 역사를 다시 읽으며 밤을 밝히는 사연은 ‘5월에 진 빚’을 모래 한 알이나 터럭 한 개만큼이라도 탕감받으려는 나의 부끄러운 허욕 때문이다.
---「1부 시간의 기억, 「5월을 위한 추도사」중에서
나는 이들 여러 이론이 실현하려고 애썼던 자유의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새로운 주장이 이전의 생각을 계승하기보다는 차라리 거부한 면이 압도적으로 크기 때문에, 새 이론이 옛 이론의 ‘발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과의 ‘대결’이란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경제학은 J양이 여러 차례 우려했듯이 현실에 자족하는 무기력한 학문이 아니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명하는’ 학문이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나는 경제학이 밥과 사람의 관계로부터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명하는 학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만, 앞의 관계는 한마디로 풍족한 밥에 대한 요구이고 뒤의 관계는 자유의 영역의 확대에 대한 집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경제학을 통해서 ‘밥과 자유’라는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두 측면을 규명할 수 있게 됩니다.
J양!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자들에게 차가운 머리(cool head)와 뜨거운 가슴(warm heart)을 함께 지니도록 당부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J양이 냉철한 지식(이론)과 열렬한 애정(실천)을 가지고 자신과 이웃이 밥을 얻고 자유를 찾는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경제학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마십시오. 결코 자상하지도 못하고 또 친절하지도 않은 이 회신이 J양이 ‘미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2부 저 낮은 경제학, 「경제학을 전공하려는 J양에게」중에서
마지막으로 남한 사회 내부에서 일정하게 요구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능이다. 솔직히 나는 이론의 혁명적 역량을 과도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인색한 채점은 이론 일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라는 특별한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올바른 이론이 혁명을 포함한 사회의 진보에 기여하는 몫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러나 혁명은 책과 머릿속에서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거사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 역시 일차적으로는 현실 비판의 영역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분배관계에서 끝나는 보수 이데올로기의 현실 비판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현실 비판은 토대의 생산관계에까지 이른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
이런 경고는 물론 일정하게 마르크스주의에도 해당된다. 설사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한다고 해도 당장 이 땅에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사정은 현실 사회주의의 추락으로 충분히 확인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구원이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원에의 기대를 버릴 수는 없는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기대 역시 혁명의 ‘예고지수’로 가늠할 일은 아니다. 여러가지로 오해를 부르기 쉬운 말이지만, 나는 혁명을 이 구원의 차원에서 구원의 문제로 대한다. 분배관계에서 정의를 찾으려는 투쟁은 성공해도 그 효과가 부분적이지만, 생산관계에서 정의를 세우려는 투쟁은 실패해도 그 영향이 전면적으로 파급된다. 혁명의 자리에 현실 비판이란 한결 초라한 과제를 대입하면서도 이런 위로로 인해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옳은 문제제기는 역사적으로 간혹 옳지 않은 대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에게 중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마르크 스주의를 상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사회의 계급적 토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며, 그것은 다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외면하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르크스주의는 그 착취의 폐절을 위한 투쟁이고 사랑일 것이다.
---「2부 저 낮은 경제학, 「오늘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무엇인가」중에서
종강이 가까운 한국경제론 강의 시간에 저는 학생들 앞에서 이런 연극을 했습니다. “올해부터 학사 관리가 아주 엄격해져서 수강생 절반을 ‘의무적으로’ 실격시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을 떼자 교실이 일순에 툰드라의 혹한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한테 무조건 F학점을 줄 수도 없으니 “학점에 여유가 있어서 이 강의 하나쯤 실패해도 별 문제가 없거나, 가정 형편이 괜찮아서 한 학기쯤 더 등록해도 큰 지장이 없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서면 아주 고맙겠다”고 시치미를 떼었습니다. 그러고는 반장을 교탁으로 불러 ‘낙제 자원’ 신청을 받도록 했습니다. 그 판에 누가 무슨 수로 입을 열겠습니까? 이렇게 자청하는 사람이 없다면 대표가 아무나 지명하라고 짐짓 ‘순교자 사냥’을 강요했습니다. 그는 얼굴이 백지로 변했고, 그의 눈길을 피하려는 학생들은 막다른 협곡에서 포수를 만난 어린 노루의 표정이었습니다. 불과 5분 가량의 촌극이었으나 학생들한테는 그 엄청난 좌절감이 5년의 무게로 짓눌렀을 것입니다. “자, 한국 경제가 당면한 구조조정과 근로자 해고의 한 단면이 이와 같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며 연극을 파한 뒤에도, 죽음의 늪 같은 교실의 정적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습니다.
---「3부 세상의 풍경, 「새해 선물」중에서
체를 두고 언젠가 카스트로는 “게릴라로서 그는 아킬레스건을 가졌어. 위험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이 그것이야”라고 경고했다. 투표 대신 정글을 택한 그의 행동에는 분명 동료들조차 꺼리는 모험주의의 체취가 풍긴다. 그러나 “나는 내각을 이끌려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늙어서 할아버지로 죽으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라는 단호한 결단과 헌신적 투쟁이 없었던들, 오늘 그의 전설은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전기 작가의 관찰대로 “체의 죽음은 그의 삶에 의미를 던지고, 체의 삶은 그의 신화에 의미를 입혔다”는 평가는 실로 정당하다. 혹시 낭만성과 비극성이 영웅의 필요조건이라면, 체의 생애에는 확실히 그런 색조가 스며 있다. 비극이 낭만을 앞선 점은 못내 아쉽지만 “혁명가는 결코 사퇴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조대로 영원히 그는 세인의 가슴에서 사퇴하지 않을는지 모른다.
---「4부 사람 읽기, 「체 1928-67-97」중에서
마지막으로 자유와 자유주의에 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봉건사회와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확립한 부르주아지가 가장 먼저 선점한 구호가 바로 자유였습니다. 자유는 그에 대항개념을 구축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에서 지배자의 통치 메뉴로서는 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제도의 성립 이래 300여 년 동안 갈고 닦아온-그리고 지금 원고도 가담하고 있는-그 능란한 자유의 행사에 섣불리 시비를 걸었던 본인의 태도가 불찰이라면 불찰입니다. 더구나 자유주의가 한 경제평론가의 무력한 원고지 위에서 간단히 허물어질 만큼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 기능이나 효력에 대한 얘기는 여기서 삼가겠습니다. 다만 원고의 주장대로 그 자유주의가 “지배 계층의 전제에 대항하는 이념”이고 동시에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가난을 함께 줄이는 “가장 좋은” 방안이라면 본인은 당장 지금부터 그 누구보다도 더 열렬한 자유주의자가 될 것을 다짐합니다. 그리고 또 반항자로 남기 위해 권위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면, 본인은 원고가 엄숙하게 전해준 더렐의 경고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본인에게 정직한 반항의 길을 걸을 용기만 있다면!
---「5부 크리티크, 「다시 자유주의자에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