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하
호는 우하(雨荷). 부산시 동래구 복천동 출생. 거구의 장신에다 호남아의 풍모를 지녔다. 그의 아버지는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뒤, 비통을 참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아버지의 의기를 이어 받은 형 문희, 문호와 누나 차정 열사를 모두 광복 항쟁과 역사의 격랑 속에 떠내려 보낸 집안의 막내였다. 가난과 핍박 속에 자란 박문하는 유복자로 태어나 호떡장수 등을 하며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부산민중병원 원장. 국제펜클럽 한국위원.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부산지부장. 『수필』지 동인. 부산시 문화상 심사위원 역임. 간암으로 58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수필집으로 『배꼽 없는 여인』(1960), 『인생 쌍화탕』(1965), 『씨 뿌리는 사람들』(1968), 『낙서인생』(1972)이 있다.
최신해
호는 삼락당(三樂堂). 1919년 4월 경남 울산에서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기중학을 거쳐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정신과교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속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하였다.
1956년에 국립 청량리뇌병원 원장이 되었고, 1961년에 일본 야마구치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하여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외래교수로 출강하였다. 신경정신과학회 학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제3의 신』(1964), 『내일은 해가 뜬다』(1965), 『외인부대의 마당』(1966), 『태양은 멀다』(1968), 『물가에 앉은 철학』(1977), 『국보 찾아 10만 리』(1985) 등 33권의 수필집과 의학 관련 저서 『노이로제의 치료』(1965), 『의학 속의 신화』(1970) 등을 간행하였다.
이장규
대전 출생. 경성제국대, 서울대 의과대학, 동대학원내과학과 졸업. 동대학병원 근무. 서울대 의학박사 학위취득. 서독 함부르크 대학 핵의학 수학. 원자력병원장.
간결한 필치로 풍자와 해학을 담은 수필을 남김.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집으로 『눈사람』, 『속상한 원숭이』, 『낮은 목소리』, 『청진기 야화』 등이 있다.
빈남수
호는 春江, 1927년에 경남 사천 출생. 대구사범 2년 수료, 대구의과대학 진학. 졸업 후 공군에 입대 군의관으로 복무. 미 공군 병원에서 공부하고 내과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대봉동에서 빈 내과 의원을 개원. 1969년에는 상주적십자 병원장으로, 1973년에는 다시 통영으로 옮겨 근무하였다.
1979년에 문인협회 포항지부를 창립, 지회장이 되었다. 80년에는 예총 포항지회 창립, 지회장이 되었다. 78년에는 한흑구 선생의 추천으로 대구의 경북수필문학회에(영남수필 전신) 입회. 83년에는 경북의대 졸업생으로 안행수필 동인회를 결성 기관지 안행수필을 발간하였다.
1969년에 문예지에 「상처후유증」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수필을 썼다. 문예지와 동인지에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집으로 『괄호 밖의 인생』(1975), 『망각의 이방지대』(1983), 『고희 기념문집』(1996)이 있다.
김사달
호는 서봉(西峰), 독학으로 의사, 서예가, 문필가로 대성한 입지전적 인물. 우리나라 최초 묵적비의 주인공으로 가정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 독학으로 초등, 중등 교원시험에 합격을 하여 세광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고등고시와 의학고시 패스.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 받음. 서울에서 박애병원을 개업. 서예 및 동양화에 능력이 남달라서 당시 전서하면 독립기념관 현판을 쓰신 일중 선생님이었고 초서는 김사달 박사였다고 한다.
수필집 5권을 내셨고, 한국수필가협회 부회장에 제1회 한국수필문학상까지 수상하셨으며, 체육에도 관심을 가져 태권도 공인 4단이었다고 한다.
저술한 책과 논문이 많았으며, 풍수서도 한문 친필로 집필하였는데 글씨가 인쇄한 글씨같이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충북 괴산 청천이 낸 최고의 인물이라 불렸으나 위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그간에 남겼던 것들을 정리하여 서봉 서화집을 남기고 3일 뒤에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