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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문고-00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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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07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180쪽 | 164g | 128*188*20mm
ISBN13 9788908060012
ISBN10 8908060014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잃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의 과거를 사는 데 있는 가 한다.
--- p. 128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道)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 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 p.66
비원은 창덕궁의 일부로 임금들이 후원이었다. 그러나 실은 후세에 올 나를 위하여 설계되었던 것인가 한다. 광해군은 눈이 혼탁하여 푸른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았을 것이요, 새소리도 귀담아 듣지 못하였을 것이다. 숙종같이 어진 임금은 늘 마음이 편치 않아 그 향기로운 풀 냄새를 인식하지 못하였을 거다.

미는 그 진가를 감상하는 사람이 소유한다. 비원뿐이랴. 유럽의 어느 작은 도시, 분수가 있는 광장, 비둘기들, 무슨 애버뉴라는 고운 이름이 붙은 길, 꽃에 파묻힌 집들, 그것들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순간 다 나의 것이 된다. 그리고 지금 내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한 나의 소유물이다.

주인이 일년에 한 번 오거나 하는 별장은 그 고요함을 별장지기가 향유하고, 꾀꼬리 우는 푸른 숲은 산지기 영감만이 즐기기도 한다. 내가 어쩌다 능참봉을 부러워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 오는 것이다. 은퇴도 하였으니 시골 가서 새소리나 들으며 살까도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꾀꼬리 우는 오월이 아니라도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우산을 받고 비원에 가겠다. 눈이 오는 아침에도 가겠다. 비원은 정말 나의 비원이 될 것이다.
--- p.41
비 오는 오월 어느 날 비원에 갔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고 주말도 아니어서 사람이 없었다. 비원은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 숲이 울창하여 산소 같은 데가 있다. 빗방울이 얌전히 떨어지는 반도지 위에 작고 둥근 무늬가 쉴 새 없이 퍼지고 있었다. 그 푸른 물위에 모네의 그림 수련에서 보는것과 같은 꽃과 연잎이 평화롭게 떠 있었다. 꾀꼬리 소리가 들린다. 경쾌한 울음이 연달아 들려온다. 꾀꼬리 소리는 나를 어린시절로 데려갔다.
--- pp. 39~40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엄마와 나는 숨기 내기를 잘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를 금방 찾아냈다. 그런데 엄마는 오래오래 있어야 나를 찾아냈다. 나는 다락 속에 있는데. 엄마는 이 방 저 방 찾아다녔다. 다락을 열고 들여다 보고서도 '여기도 없네'하고 그냥 가버린다. 광에도 가보고 장독 뒤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하도 답답해서 소리를 내면 그제서야 겨우 찾아냈다. 엄마가 왜 나를 금방 찾아내지 못하는지 나는 몰랐다. 엄마와 나는 구슬치기도 하엿다. 그렇게 착하던 엄마도 구슬치기를 할 때는 아주 떼장이었다. 그런데 내 구슬을 다 딴 뒤에는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었다. 왜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는지 나는 몰랐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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