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컬리즘의 기원
신디컬리즘 조직의 기원과 발전은 사용자들이 모든 형태의 독립적 노조 조직을 매우 적대시한 데서 비롯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상대적 후진국이던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지주계급은 터무니없이 반동적이었고 농업 노동자를 가혹하게 착취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흥 자본가계급도 일체의 노조 결성 기도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 미국의 산업 노동자들은 (주로 숙련 노동자였고 이민노동자 비율이 매우 높았는데) 더 나은 삶을 기대하며 유럽에서 건너왔지만, 형편없는 임금과 고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흔히 산업 현장이나 작업장에는 노동조합도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은 가장 기본적인 권리, 즉 조직하고 파업하고 피케팅할 권리를 위해서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직을 건설하려고 시도한 많은 노동자가 해고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투옥되고 때로는 살해당했다. …
국제적으로 신디컬리즘 운동의 성장을 촉진한 상황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20세기 초의 몇 년 사이에 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불안정의 조짐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 예컨대, (외국 자본주의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성장률은 떨어지고 산업 생산성은 둔화하는 와중에) 영국 자본주의의 지위가 점차 위태로워지면서 노동계급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낮아졌다. 1900~1910년에 실질임금이 약 10퍼센트 감소해서, 노동자들의 경제적 불만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아일랜드에서도 1905년부터 1912년까지 식료품 가격은 25퍼센트 치솟고 실업률은 계속 20퍼센트를 웃돌았다.
신디컬리즘의 기여
신디컬리즘의 주된 기여는 노동조합 안에서 혁명적 전략과 전술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비록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가 노동조합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선구적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대중적 노동조합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당연히 많은 물음을 답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겨 뒀다. … 신디컬리스트들은 작업장 활동가로서 노동조합 문제에 접근한 덕분에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노동조합운동의 동역학에 관한 근본적 특징들을 끌어낼 수 있었다. 특히, 영국의 신디컬리즘은 (ISEL과 전시 직장위원회 운동에 모두 반영됐는데) 노동조합 관료의 성격이나 현장조합원과 노조 상근 간부층의 충돌을 이론적으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노조 상근 간부층의 지배력을 극복할 수 있는 독특한 실천적 수단을 보여 주기도 했다. 영국 신디컬리스트들이 발전시킨 독립적 현장조합원 조직 모델은 (특정 상황에서는 노동자 평의회, 즉 소비에트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는데) 당시 코민테른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한 것이었고,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신디컬리즘의 유산
비록 나중에 소멸했지만 신디컬리즘은 많은 나라에서 미래 세대의 노동조합·정치 활동가들에게 오랫동안 지속될 유산을 남겨 줬다. 예컨대, 1930년대 미국에서는 대규모 산업 투쟁 물결이 다시 전국을 휩쓸었고, 새로 결성된 산업별조직회의CIO가 대량생산 산업들에서 미숙련 노동자와 외국 태생 노동자를 대대적으로 조직하는 운동을 펼쳐 크게 성공했는데, 그 전에 IWW가 없었다면 사정은 사뭇 달랐을 것이고 확실히 효과도 적었을 것이다. … CIO의 조직화 운동에서 매우 두드러진 효과를 낸 점거 농성 전술도 사실은 IWW에서 직접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1937년 미시간 주 플린트에서 제너럴모터스GM 노동자들이 공장점거 투쟁을 벌였는데, 그보다 30년도 더 전인 1906년에 IWW는 뉴욕 주 북부 스키넥터디의 제너럴일렉트릭GE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해고당한 것에 항의하는 점거 농성 투쟁을 이끌었다. 1906년 파업은 IWW의 다른 많은 투쟁과 마찬가지로 패배했지만, 생산 현장의 공격적 직접행동에 관한 교훈을 남겼다. 또, IWW의 노래 [영원한 연대]는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미국 노동운동의 대표적 가요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들에서도 신디컬리즘 전통은 후세대의 노조·정치 활동가들에게 상당히 존중받았다.
신디컬리즘의 약점
신디컬리스트들은 모든 노동자 정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혐오했다(따라서 정치적 중립성과 절대적 독립성을 원칙으로 내세웠다). …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자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같은 ‘정치적 사회주의자들’과 달리 신디컬리스트들은 정당이 계급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신디컬리스트들이 스스로 ‘비정치적’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그들이 ‘반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하는 비평가들도 있지만 실제로는 신디컬리스트들이 다양한 직접적 정치 쟁점에 관여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미국에서 IWW가 벌인 ‘자유 연설’ 운동은 혁명적 노조를 널리 선전하려고 거리 모퉁이에서 빈 상자 위에 올라가 웅변과 연설을 할 권리를 옹호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IWW는 불가피하게 법원에서 각 주州의 법률과 정치적 권위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CGT는 군 복무 기간 연장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스페인에서도 CNT는 프랑코의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에서 극히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리고 모든 나라에서 신디컬리스트들은 제1차세계대전에 반대했다.
그렇지만 대체로 신디컬리스트들은 정치 문제가 산업 조직과 작업장의 직접행동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불화를 일으키는 정치조직이 아니라 공격적 산업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의 단결과 계급의식이 발전할 수 있고 노동자들이 경영진의 특권을 점차 잠식해서 미래의 산업 공화국 틀을 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정치 문제는 산업 조직과 노조 투쟁에 종속된 것으로 여겼고, 당 조직이 아니라 노조가 노동계급을 구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디컬리즘과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변혁 전략으로서 신디컬리즘의 유효성은 마르크스주의라는 더 발전되고 더 풍부한 전통에 의해 추월당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두 전통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예컨대, 아래로부터 혁명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을 옹호했다는 점,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는 점, 노동조합을 혁명적 기구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또, 어느 정도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자체가 신디컬리즘의 영향을 받아서 개선되기도 했다. 특히, 노동조합 투쟁이 공산주의 프로젝트의 핵심에 자리를 잡았(고 그래서 이전의 볼셰비키 경험 위에 구축됐)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신디컬리즘 전통에 내재한 많은 결정적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예컨대, 산업 투쟁을 더 광범한 정치 쟁점들과 연결해야 한다는 점, 산업 투쟁이 무장봉기를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지향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점, 노동계급 운동 안에서 중앙집중적 지도를 제공하는 혁명적 정당이 필요하다는 점, 혁명의 주요 기구이자 노동자 권력기관으로서 소비에트와 비교했을 때 노동조합은 불충분하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신디컬리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비판은 러시아 혁명과 코민테른·적색노조인터내셔널의 창립에서 절정에 달했고, 나중의 이론적 작업과 실천적 경험을 통해 더 풍부해졌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신디컬리스트 상당수가 공산주의로 전향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