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꿈을 많이 꾼다. 거의 매일 꿈을 꾸는데, 그 꿈 등을 매일 매일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들이 재미있는 것도 있고, 엉뚱한 것도 있는데, 어떤 꿈은 미래를 예시하는 것도 있다.

내 호가 무초(無草)인데, 이 호도 꿈 때문에 생긴 것이다.

30년 전의 일이다. 하루는 잠을 자고 있는데. 다섯 사람이 나에게 오더니 자신들은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유청(裕靑)'이라고 대답을 하자 그들은 나에게 '무초'라는 호를 쓰라고 했다. 유청이라는 호는 윤경렬 선생이 선생과 지인들의 일파라는 의미로 청(靑)의 돌림자를 써서 지어 준 것이다. 굳이 뜻을 풀자면 너그럽고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 호가 나는 참 마음에 들었는데, 꿈에서 무초라는 호를 쓰라고 하니 의아했다.

우선 무초라는 뜻을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베사메 무초'의 무초인가 하면서 그냥 꿈 속의 일로만 여겼는데, 자꾸 무초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3년을 두고 그 뜻을 생각했다. 무초는 없을 무(無)에 풀 초(草)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풀이 돋아나 자란다는 뜻이었다. 풀은 처음으로 시작되는 생명체인 것이고 보면 없는 것에서 새로이 만들어 낸다는 뜻이 일깨워졌다.

그뜻을 새기고 보니 그 호는 내가 할 일을 빗대어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내 상황에서 너무도 알맞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고, 아무에게도 배울 수 없는 전통 가마를 시작했고, 아무도 모르는 정호다완의 뜻을 찾아 사발 빚기를 시작한 것 등 모두가 무(無)의 상태였다. 본 바가 없었고,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정호다완의 뜻을 생각해 내고, 전통 가마로 재현하려고 마음 먹었다. 그러니 처음 지상에서 생명이 소생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또한 내가 최초로 다도라는 문화를 우리 나라에 들여왔고, 최초로 들차회를 만들고, 황토방을 만들고, 정호다완을 재현하는 것은 모두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시작된 것으로 그 꿈이 헛된 꿈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막사발'하면 조선 시대 말기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음식을 담는 그릇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 되어버렸다. 그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기 영혼을 쏟아넣는 집념어린 이야기는 자못 긴장감을 자아낸다. 인생에 대한 투철함과 처절함이 그 집념 속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br/><br/>"일본 도쿄 박물관에서 '정호다완(井戶茶碗)'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조선의 막사발이 '정호다완'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우리네가 밥사발로 쓰던 그릇이 일본에 가서 국보가 되어 있는 것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조선의 막사발이 일본의 다도에 쓰이는 그릇이 되었고, 그 가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만 해도 성(城)하나와 바꿀 만큼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랐습니다." 당시 의상 디자이너로 호라동하던 최차란 씨가 막사발을 빚는 도예가로 변신하게 된 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br/><br/>동학 교조 최제우의 후손이고, 3대째 옹기장이 집안에서 태어난 최차란씨에게는 막사발과의 만남이 어쩌면 필연일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는 어느 순간부턴가 막사발에 미쳤다. 최차란 씨는 우선 막사발을 빚기 위하여 일본에 가서 다도부터 배우기 시작하였다. '정호다완'이란 일본에서 다도로 쓰이는 그릇이었던 것이다. 즉 다도를 모르고서 막사발을 빚어낼 수 없다는 판단이 섰고, 그래서 먼저 다도의 정신을 익히는 데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br/><br/>일본에서 정식으로 다도를 익힌 최차란 씨는, 그것을 토대로 한국적인 다도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질 좋은 황토가 나는 경주에 새둥이요를 설립하여 막사발을 빚는 일에 열중하였다. 20여 년간 그는 일본을 넘나들며 다도를 사사하여 자격증을 획득하였고, 다도 평론가를 찾아가 자신이 빚은 막사발을 평가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된 빛깔의 재현을 앞두고 느닷없이 전신암을 선고받았다. 그때는 이미 그의 나이 예순아홉 살이었다.<br/><br/>사실상 최차란 씨의 인생은 중병의 연속이었다. 스물네 살 때 폐병을 앓다 한쪽 폐를 들어내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고, 중년에 이르러 자궁함을 선고받고도 살아났으며, 마침내 노년에 이르러 전신암을 앓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에 대한 집념 앞에는 전신암도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이 일상의 밥처럼 대하는 황토에 대한 막사발을 빚기 위해 늘 만지던 흙으로 만든 황토방에서 20일간 찜질을 하며 암세포를 말끔하게 몰아냈던 것이다.<br/><br/>기적처럼 병이 완쾌되어 황토방에서 나왔을 때 최차란 씨는 '회전원리'의 철학까지도 터득하였다. 회전원리란 우주의 생성원리로까지 확장되는데, 즉 물레의 회전에 의해 막사발이 탄생되는 과정도 생명체의 탄생 과정에 다름아니라는 것이다.<br/><br/>막사발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는 것, 이것이 '도예가 최차란'의 예술 정신이다. 어쩌면 이러한 그의 예술 정신은 집안의 내력과 관계가 깊을지도 모른다. 5대조 할아버지 최제우의 피를 이어받아 하늘의 원리를 도예 정신 속으로 끌어들이고, 3대에 걸친 옹기장이 집안의 전통을 살려 막사발을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