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론: 기억간의 전쟁
필자는 일종의 불교심리학의 시각에서 무자각적인 인간의 하의식―본능·생리·습관·공동기억 등―에는 자기 추동적인 형성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 글을 시작했다.76) 내셔널리즘은 집단적 형성력의 자연적이며 현실적인 발로이지만, 인류역사에 엄청난 비극과 고통[業繫苦]을 초래한다는 것이 큰 문제라고 했다. 내셔널리즘이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본성 자체라고는 부르지 않으련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라면,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발생했던 온갖 침략·착취·억압·폭력을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에 대해 도덕적인 단죄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국사 해체와 국민의 상대화, 그리고 내셔널리즘의 극복을 주창하는 자들은 숙명을 거부하는 자들이고 어느 정도는 낙관적인 자들이다.
우리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도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침략과 억압을 가져온 역사를 기억하며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국가로 회수되기 이전의, 또는 국가를 넘어선 인간존재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고바야시 류의 ‘국가의식’=주체성은 사이비 주체성이다. 공(公)의 제약을 넘어가는 개(個)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의식’=주체성은 초국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개인을, 국가의 공(公)을 넘어가는 보편을 꿈꾸는 개인을, 그리고 니시다식의 국가·도덕·종교의 삼위일체를 넘어가는 개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개인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민의 상대화와 ‘국사’의 대연쇄 고리의 단절에 대해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국가간의 아진 분별 위에 성립한 근대국가에는 무지와 폭력이 내재해 있다. 여기에 내재한 무지와 폭력의 역사적인 기원을 찾기 위해서라면 인류가 지구상에서 집단으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 태고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이제 국가의 무지와 폭력의 뿌리는 국민 개개인의 심신에까지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내셔널리즘은 국가간이나 민족간의 역사적·정치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문제이기도 하고, 내셔널리즘에서 집단과 개인의 속박과 해방을 보는 자에게는 종교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국민국가가 오늘날 진정으로 성숙해지려면, 과거 쇼와기에 내셔널리즘의 돌출·과도·파행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반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오늘날 상당수의 일본 정치가와 지식인들이 공동의 기억, 무자각적 자연주의를 내세워 내셔널리즘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보수우익에 맞선 한국인의 내셔널리즘도 그 강고성에 있어서 단 한치도 밀리지 않는다. 아니 우리의 내셔널리즘이 더 단단하고 더 뜨겁고 그래서 더욱 맹목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순신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고구려’를 열렬히 찾아 나서고, 실제로 무인도에 가까운 독도를 위해 나라 전체의 존망까지 걸기도 하고, 일방적인 국사교육을 강화한다면, 이는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이런 행위가 장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일본이나 중국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해서 결국에는 그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이런 긴장·갈등·대립은 전쟁의 위험을 낳을 수 있으므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외교적인 설득을 앞세워 독도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독도를 두고 전쟁까지야 할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전쟁을 하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일본을 이길 만한 해군력도 없다. 미국이 은밀하게 일본을 돕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전은 그만두고 외교전에서나마 승리할 수 있을까? 애국심이 아무리 뜨거워도 그것이 해전이나 외교전에서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외교전의 승리도 외교만이 아니라 군사력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승산 없는 전쟁이라면 처음부터 벌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오히려 후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기억간의 전쟁은 다차원적인 것이다. 어느 차원의 전쟁이든 모두 국가간에 벌어지는 정치적·역사적·생물학적인 싸움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일본 내부에서는 과거의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기억과 증언의 의무를 강조하는 그룹들이, 대동아전쟁을 찬미하고 ‘공=국’을 부르짖는 세력과 격돌하고 있다. 한반도에는 분단의 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기억을 축적해온 남과 북이 싸우고 있다. 남한 내부에서도 과거사를 정리하는 방법에 대해 시비가 일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간의 아진 분별을 완화하기 위해, 국사와 국민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내셔널리스트들과의 싸움에서 공동전선을 펴고 있다. 이 싸움은 정치와 역사, 교육, 스포츠 그리고 문화 전반에서 벌어지는 전면전이다. 우리 개개인의 마음속에는 아진 분별심과 자타불이의 자비심이 싸우고 있다.77) 기억은 강고하고 싸움은 지구전이다. 기억간의 전쟁이라고 해도 우리가 말법(末法)의 시대에 사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전쟁인지도 모른다.
다차원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기억간의 전쟁 앞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첫째, 다수 대중의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내셔널리즘은 대단히 이기적이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점, 둘째, 국민이 무자각의 내셔널리즘이 초래할 결과를 제대로 예측하고 두려워하기 전에는, 그리고 무연의 자비를 어느 정도나마 배우기 전에는 국민-중생의 위치를 상대화할 수 없다는 점, 셋째, 일본의 초국가주의 아래에서 그리고 한국의 군사 파쇼 아래에서 개(個)의 확립이 중요했듯이, 민주주의 시대의 대중매체가 생산하고 전파하는―획일성을 강요하는 파쇼적―국민정서나 국민감정에 저항할 수 있는 개인을 확립하는 것이 아주 긴요하다는 점, 넷째, 국사 해체를 위한 연대는 국민의 본능과 생리에 대해, 그리고 국민 이전에 존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상의 어느 것도 아주 어려운 작업임을 고백해야 한다.
아(我)와 진(塵)을 분별하는 것, 곧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은, 인간 본성에 가까운 욕망의 표현이고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자비를 가르치는 불교는 국민-중생이 아진 분별의 형성력으로 조작해낸 내셔널리즘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78)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는 일체의 아진 분별을 초월할 수 있는 사랑을 무연지비(無緣之悲)라고 불렀다. 그 사랑은 부처가 중생 모두를 자식으로 삼아 자타의 분별을 떠나 사랑하는 대비심이다.79) 대비심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아진 분별력을 연(緣)으로 삼고 있는 국민은 지극히 왜소한 중생이다. 앞에서 뜨거운 애국심을 지닌 국민-중생은 하릴없는 중생이고 부처로부터 한없이 떨어져 있는 존재라고 했다. 말법의 시대에 국민이 집단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불교와 인연을 맺어온 동아시아 사람들이 자비심을 조금이라도 내어 극히 왜소한 중생의 지경은 되지 말아야만, 지금보다는 좀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라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우리 국민이 애국적인 열정과 구호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아둔한 존재다.
백불(百佛)이 출현해도 우리 속에서 역동적으로 그리고 종종 광포하게 움직이는 집단적인 형성력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힘의 결과인 군사력과 경제력이 판치고 있는 이 냉혹한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생존마저 재대로 보장받지 못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형성하고 지속하려는 욕망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속에서 저들의 욕망을, 저들 속에서 우리의 욕망을 보아야 한다. 욕망에 대한 이런 통찰은 우리를 반드시 희생이나 자비로 인도하지는 않더라도 공존으로는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욕망과 힘 그리고 상대방의 욕망과 힘을 알아서 공존하자는 것이다. 비록 모든 국가들이 전부 국민-중생의 집단이라고 해도 욕망과 분노, 아견을 적절히 통제하고 식혀서 공존하는 편이 공멸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글을 마치려고 한다. ‘국사’ 해체론자들은 아진 분별에 기초를 둔 애국심의 진상을 폭로하고 힐문하는 과정에서 국적(國賊)이나 매국노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심신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내셔널리즘을 깨닫고 그것을 개인적 차원에서나마 극복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에 대해서는, 한국인 와카(和歌) 시인이었던 고(故) 손호연(1923∼2003)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일본정신의 상징 사이에서 거의 평생 갈등했던 그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읊고 있었다. “절실한 소원이/나에겐 하나 있지/다툼 없는 나라와 나라가 되라는.”
--- pp. 5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