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문 사설을 읽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 지적, 주장, 반박, 질타 모두가 옳다. 사설뿐이 아니다. 신문과 잡지와 텔레비전 프로에 나오는 외부 기고가들의 칼럼이나 저명인사들의 강연이 모두 그러하다. 이런 글과 강연 가운데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는 설교조가 많은데 예외 없이 직위와 돈보다 인간다운 삶이 더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평소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게 아니다. 인간답게 살지 말라든가 그릇되게 살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실제는 그런 쪽으로 사람들의 가치관과 행동이 바뀌도록 쓰고 말하는 일이 다반사다. 그 보도는 과거 행적이야 어찌 되었든 큰 직위를 차지한 사람, 큰돈을 번 사람들의 얘기로 가득차 있으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출세한 사람, 성공한 사람, 우리 사회의 인물이라고 대중에게 줄기차게 가르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봐 출세와 성공이 참되게 사는 것과 정비례해왔다면 좋은데, 오히려 그 반대가 현실이었다면 이것은 사회에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부분 기회주의자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듧다 출세하는 확률이 높았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현재 계속되는 MBC의 인기 프로 <성공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고 느끼는 바 크다. 이들 모두가 "성공"하기까지 쏟아부은 피나는 노력을 백 번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 상당수 인사들의 노력은 과연 모두 정당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부분도 많았다. 군사정권시절 집권 주체세력에서 밀려났다가 다시 복귀하여 요직에 오른 한 인사가 열 올리며 한 성공담이 기억난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사회에서는 어려울 때일수록 약세를 보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서 돈을 끌어모아 최고급 벤츠차를 사고, 모든 소지품을 외제 최고품으로 갖추고 1년 동안 독한 마음을 먹고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노력으로 하니까 일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가 의미하는 노력은 정권의 실세들과의 줄 만들기였다.
--- pp.368-369
우리 신문에는 매일과 같이 대형 비리와 스캔들에 대한 기사가 크게 보도되지만 독자의 이용은 흥미 이상이 아닌 것이 보통이다. 그리하여 요즘의 수용자들은 앞서 언급한바 메시지 홍수 속에서 일어나는 무감각증과 함께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으로 바뀌고 있다. 수백 억 대의 대규모 부정부패 사건 보도에 매일 노출되는 국민은 웬만한 부정에 대하여는 "그까짓 걸 가지고"와 같은 태도를 갖게 된다.
어떤 경우는 그 정도가 아니다. 공공보도를 자처한 기사가 문제해결은커녕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 가령, 겉으로 봐서는 청소년 성매매, X양의 "풀 버전", 티켓다방 등 윤락산업의 실상을 폭로하고 규탄하기 위한 듯한 신문, 잡지와 텔레비전의 심층보도가 그런 비리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예전에 몰랐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요즘 주부 1,000명 대상 조사결과라며 "몇프로가 결혼 후 남자친구를 사귀었다"와 같은 기사를 쓴다면 그 사회적 효과는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주부마저 들뜨지 않을까. 지나치게 흥미 중심으로 자세하게 알려주는 범죄 보도가 범죄 수법을 가르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비난은 꽤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과거 쿠데타를 음모한 장군, 부정의 대부라고 할 만한 정치 실세들의 숨은 과거 얘기들을 "인물 탐구" "인물평" "남성탐구" "진상" 등의 이름으로 신문과 잡지가 연재로 싣는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보도의 효과는 독자들의 마음에 "정치는 으레 그런 것"이라든가 "그들은 그래도 큰 인물이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는 엉뚱한 효과를 가져온다.
--- pp.210-211
기자들의 이권개입은 기사만으로가 아니다. 과거 경찰, 법조계 출입기자는 피의자들을 위해서 계류중인 사건에 개입하고, 인·허가권을 가진 행정부서 출입기자는 업자들을 대신하여 민원을 해결해주고, 경제부 기자는 관계기관으로부터 미공개 정보를 받아 유리한 재테크로 이익을 챙기는 등 그 방법은 광범했다.
한국의 기자단은 늘 회원가입 자격을 일정 언론사에 제한하는 관례를 오래 엄격히 지켜 왔다. 그리고 과거 기자실 출입구에는 꼭 "회원 외 출입을 절대 금함"이라는 살벌한 경고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엄격하게 지켜져 왔다. 주무부서 과장 이상 자리 책상에는 개인 얼굴 사진이 들어 있는 출입기자 회원명단 카드가 놓여 있었다. 기자단과 기자실의 운영이 그렇게 베일에 가려지고 배타적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긍정적인 대답을 생각해낼 수가 없다.
나는 뉴욕에서 공부를 할 때, 그 교과과정의 일부로서 유엔 본부와 뉴욕 시청을 몇 달씩 취재하러 다닌 적이 있다. 거기에도 기자실들이 있는데, 한국에서처럼 문 앞에 회원 외 출입을 금지한다는 푯말은 물론, 외부인이 들어와도 어느 언론사에서 왔느냐고 묻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촌지와 같은 비리가 아니고 취재 편의를 위한 장소라면 기자실을 그렇게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스럽고 으시으시한 통제구역으로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취재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여기에 들어올 리도 없고 또 들어오더라도 거기에 잃어버릴 물건이나 서류가 놓여 있지 않을 것이므로 내버려두어도 된다. 한국의 관청 출입구에는 대부분 경찰이 경비를 서 있어 기자실의 치안이 걱정되는 것도 아니다. 또 미국의 기자실에는 중요한 외부 인사와의 기자회견이 있을 때가 아니라면, 기자들이 웅성웅성 모여 앉아 있는 것을 잘 보지 못한다. 과거 한국에서처럼 거기에서 여러 기자들이 짝을 지어 장기 두고 있는 장면은 더더욱 없다.
--- pp.308-309
과거 너무 빠른 권력이동과정에서 정치적 실세의 부침도 그만큼 예측 불허였다. 매번 권력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 실세로 부상하는 사람이 있다. 언론은 재빨리 그를 향하여 괴상하리만큼 많은 보도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물연구" "장관열정" "명사탐방"과 같은 거창한 부제를 단 인물보도를 했다.
실세는 이런 언론의 호들갑 보도로 일약 유명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군 출신 독재자들을 갖가지 이름으로 영웅으로 만들었는데, 그런 기사를 쓴 장본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하다. 이런 언론의 전통은 장기집권한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만든 때부터 시작되었다.
큰 직함=큰 인물=출세라는 잘못된 인식을 오늘의 한국인 마음 속에 굳건히 자리잡게 만드는 데 공헌한 과거 노골적인 언론기사의 예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약 10여 년 전만 해도 잡지에 흔히 나왔던 "경기고 XX회 졸업생" "상대 XX기 졸업생" "육사 XX기 졸업생"과 같은 제목들의 기사는 예외 없이 활동분야를 관계, 재계, 학계, 정계, 법조계, 문화계 등을 나누어 동기생 중 누가 어디 무슨 자리에 앉아 잘 지내고 있는가를 자세히 알리는 것인데, 그 가운데는 "역사를 창조할 의무를 무겁게 짊어질 우리나라의 지성인"이라는 말도 들어 있었다.
"가장 높게, 가장 빨리 뛴 용비시대의 영웅들 특별조사" "대야망의 동기생들-졸업생 318명 중 83명이 대기업체 사장들인 서울 상대 19XX 졸업생 출신들의 현대사" "최강의 파워 그룹"도 주류 언론에 속한다는 잡지에 나왔던 기사 제목들이다.
--- pp.9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