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 <괴물>은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영화였다. 비록 <지옥의 묵시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소규모(?) 영화이지만, 나름대로의 고통과 눈물, 광기와 집착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 고통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제작과정의 순간순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 감독 서문 중에서
현서가 괴물에게 끌려가는 장면은 바지선에 크레인을 올리고 와이어로 현서를 연결하여 강에 빠뜨린 후 물살을 일으키면서 끌고 가는 식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 고아성 양은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에서 와이어 연기를 해본 경험이 있어서 와이어 연기가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한강'이었다. 멀찌감치서 바라보는 한강은 평화스럽고 잔잔하지만 직접 그 물 속에 빠져서 (그것도 와이어에 매달려서) 끌려가기에는 거칠고 험하며 '검은 물살'이 흐르는 큰 강이다. 적절한 화면을 얻기 위해 테이크가 거듭 되고 고아성 양은 계속 와이어에 매달려 한강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해야 했는데, 아역배우의 '잔인한' 고생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감독이 결국 컷을 부르고 말았다는 후일담이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나는 죽으면 지옥 갈 거야."라고 수없이 중얼거렸다. 여린 여중생이 크레인에 달려 오르내리면서 거칠고 험한 한강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하는 모습을 아무 감정 없이 지켜볼 만한 강심장의 소유자는 최소한 <괴물> 스태프 중에는 없었다.
--- p.99
현장에서 괴물 역할은 검은 타이즈를 입은 사람들이 천을 댄 양동이를 들고 맡았다. 송강호씨는 그 양동이를 상대로 딸을 되찾기 위해 공포스러운 괴물과 맞서는 연기를 해야 했다. 송강호 씨가 힘이 센 편이어서 여러 사람들이 양동이를 받치고 있어야 했다. 집중력 있게 연기를 펼친 송강호 씨의 열연이 없었다면 이 부분은 엉성하게 완성되었을지도 모른다. 봉준호 감독은 송강호 씨를 'CG를 실사로 끌어오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CG를 비롯한 특수효과가 많은 영화에서 자칫 실제 배우들이 CG에 흡수되는 경우가 많은데, 송강호 씨의 경우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에너지를 통해 CG를 현실로 끌어당긴다는 것이다. 크리처 디자인의 단계에서도 '송강호와 마주 섰을 때 어울려 보여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중략)
괴물의 입에서 강두가 아이들을 꺼내는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연기를 하는 송강호 씨는 절로 통곡을 터뜨렸는데, 봉준호 감독은 그 얼굴을 정면에서 클로즈업하기보다는 (모든 감독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임에도 불구하고) 강두의 등을 카메라로 잡는 편을 택했다. 자신의 딸이 죽고 그 아이가 살린 다른 어린아이를 끌어안는 강두의 심정을 연기한 배우의 감정을 송강호 씨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그 어떤 누구도 이 어린 두 영혼을 도와주지 못했다는 거죠. 두 영혼이 누구도 도와주지 못한 상황에서 스스로 자기들끼리 끌어안고 나오는 것을 볼 때는, 아버지로서의 느낌보다는 이 사회의 어른 입장에서 통곡의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현서의 마지막 체온을 느꼈던 세주가 강두에게는 현서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실오라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세주가 눈을 뜨고, 그러니까 새로운 희망으로 눈을 뜨는 거죠. 그렇든, 안 그렇든 강두는 세주를 안았을 거 같아요. 살아있기 때문에 안고 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만약 아이가 죽었어도 안고 가지 않았을까 싶어요."
--- p.147
디자이너 장희철 씨가, <괴물>의 미술감독인 류성희 감독에게서 전화를 받고 있는 친구와 함께 있었던 것은 2003년 12월의 일이었다. 마찬가지로 디자인 업계에서 일하고 있던 그 친구는 한 다리를 건너 류성희 감독에게서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에 등장할 괴물의 크리처 디자인을 할 사람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평소 그런 분야에 흥미가 있었던 장희철 씨는 자신이 한번 감독을 만나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005년 여름까지의 고난의 작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봉준호 감독과의 첫 만남에서 장희철 씨는 물방개가 변이된 것 같은 형태의 괴물을 디자인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왔다. 괴물이 사람의 옷을 벗겨 잡아 먹는 과정을 동작별로 묘사한 스케치였는데, 디자인도 디자인이었지만 그 포트폴리오를 만든 방식이 감독의 마음을 더 사로잡았다. 디자이너 본인의 셀프 포토레이트 사진(누드가 포함된)을 합성해서 괴물 스케치를 완성해갔던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처음부터 괴물의 모습을 어느 정도 정해놓은 상태였다. 교각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 꼬리를 이용해 다리에 매달려 있는 모습, 사람을 확 낚아채는 꼬리, 산 페르민 축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면서 몰아대며 땅 위를 달리는 황소의 이미지 등이 감독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직접 해놓은 스케치도 있었다. 괴물의 크기도 어느 정도 구체화되어 있었다. 사람을 입으로 삼킨 후 머금고 있다가 뱉어놓는다는 설정도 이미 정해져 있었다.
--- p.158
봉준호 감독과 장희철 씨가 비교적 마지막까지 합의를 이루지 못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괴물의 움직임에 관한 것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이 한강 둔치에서 사람들을 몰아대면서 '쿵, 쿵, 쿵'하며 육중하게 움직이는 느낌을 원했다. 하지만 디자이너가 선호한 느낌은 그것보다는 '사사삭'하고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쪽이었다. 어디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 더 공포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감독의 의도를 디자이너가 받아들이면서 괴물의 디자인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뒷다리의 형태, 꼬리의 길이가 결정되었다.
--- p.159
장희철 씨는 괴물의 입장에서 괴물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강에서 부모도 친구도 없는 상황에서 5년을 살았다. 다른 생물들은 유전자의 명령이나 부모에게서의 학습을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익히지만, 괴물에게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다. 유전자의 명령은 매우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뒤섞여 있다. 몸집만 클 뿐, 한강이라는 거칠고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들게 살아온 녀석이다. 언제나 외롭고 슬픈 마음이었을 것이다."
---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