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매켄지 프리스트는 1943년에 잉글랜드의 체셔 주에 인접한 맨체스터 시(현재는 스톡포트) 근교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이미 독서에 열중하던 조숙한 소년이었던 그는 16세에 맨체스터의 퍼블릭스쿨을 졸업하고 회계 사무소에 취직했다. 무미건조한 회계 업무의 압박에서 해방되기 위한 방도로 짬짬이 SF를 썼고, 1966년에 처녀 단편 「도주The Run」를 브리티시 뉴웨이브 운동의 온상으로 유명했던 『뉴월즈』지의 자매지 『SF 임펄스』지에 게재함으로써 SF계에 데뷔했다.
1970년에 발표한 처녀 장편 『세뇌자Indoctrinaire』의 성공으로 그는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이 작품은 남극에서 향정신 약품을 개발 중이던 과학자가, 자신이 개발한 약품이 22세기의 암울한 전체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데 쓰인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고투한다는 내용의 일종의 시간 여행 소설이다.
제2 장편인 『어두워지는 섬을 위한 푸가The Fugue for a Darkening Island』(1972)는 『세뇌자』의 디스토피아 묘사를 잇는 근미래 정치소설이며, 작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현실적이고 박력 있는 문체가 살아 숨 쉬는 작품이다.
프리스트가 작가적, 문학적으로 완전히 환골탈태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은 2년 뒤인 1974년에 발표된 제3 장편 『역전된 세계The Inverted World』였다. 지면이 수학적인 쌍곡면을 이루는 이세계(異世界)에서, 지면에 깔린 레일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너비 1500피트의 거대한 <도시>와 그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영국과 미국의 SF 문단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에서 출간된 소설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명작>이라는 찬사에 걸맞은 중후한 필치는 프리스트를 일약 SF계의 기린아로 만들었다. 『역전된 세계』는 영국 SF 협회의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의 휴고상 장편 부문에서는 수상작인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과 마지막까지 경합했다.
그 이래 프리스트는 H. G. 웰스의 파스티슈인 『스페이스 머신The Space Machine』(1974), 꿈과 가상현실의 인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춘 『웨섹스의 꿈The Dream of Wessex』(1977), 중단편으로 이루어진 <꿈의 군도The Dream Archipelago>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기억과 정신 분열을 다룬 『확인The Affirmation』(1981) 등을 발표했다.
프리스트에 대해 영미권 문단은 거의 예외 없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1970년대에는 브라이언 올디스나 J. G. 발라드에 비해 그리 눈에 띄지 않는 브리티시 뉴웨이브의 신인 취급을 받았던 프리스트가, 1980년대 들어서는 살만 루슈디와 그레이엄 스위프트와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젊은 소설가 10인>으로 뽑히게 된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존재한다.
1984에 초판이 출간된 본서 『매혹』은 이런 변화의 논리적인 귀결이자,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작가의 가장 기본적인 테마를 지적인 동시에 정서적인 입장에서 해부한 걸작으로 독일에서 주어지는 쿠르트 라스비츠상의 최우수 장편 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프리스트는 6년간의 공백 기간을 거쳐 근미래의 영국을 무대로 한 정치소설 『조용한 여자The Quiet Woman』(1990)을 발표했다. 1995년부터 약 3년의 간격을 두고 『명성The Prestige』(1995), 『극한The Extremes』(1998), 『분열The Separation』(2002)을 내놓았고, 『명성』은 『메멘토 Memento』(1980)의 감독인 크리스토퍼 놀란에 의해 2006년에 영화화되어 개봉을 앞둔 상태이다.
현재 크리스토퍼 프리스트는 이스트 서섹스 주 연안의 항구도시 헤이스팅스에서 작가이자 두 번째 부인인 리 케네디와 두 명의 10대 쌍둥이 자식들과 함께 살면서 다음 작품을 집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