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실크로드건 현대적 실크로드건 간에 실크로드란 조어(造語)는 유럽문명 중심주의의 소산이다. 원래 실크로드란 명칭은 중국 비단의 일방적인 대서방 수출에서 유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단이 로마제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진귀품이었음을 기리기 위해 사용되어왔다. 사실 비단이 동서 교역품의 주종으로 오간 것은 기원을 전후한 짧은 한때의 일에 불과한 것으로, 진정한 문명교류의 차원에서 유래된 말은 아니다. 따라서 그 사용이 적절치 못하기는 하지만, 비단이나 비단 교역이 지니는 상징성 때문에 하나의 아칭(雅稱)으로 그냥 관용되었다.
--- p.14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던 상인들을 상세히 기록한 현존 자료 중 첫 번째는 600년경 투르판 외곽의 한 관소에서 1년 동안 거둔 세금의 내역을 기록한 영수증 37건이다. 신발 바닥에서 분해했기 때문에 이 영수증들은 내용상 단절이 있으며 연속적이지 않다. 현지의 관리들은 매 보름마다 거둔 세금을 장부에 기록했고 그 액수를 은화의 수로 적었다. 첫째 달과 열두 번째 달 사이의 보름 기간 중 아홉 번은 전혀 세금을 징수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이 특정 세관의 세무가 불안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37
7세기 소그드 무용인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좁은 소매가 달린 아래 도련이 넓은 포를 입고 반소매의 반비를 입고 있다. 심목고비이며 장화의 끝과 손끝도 뾰족하게 과장된 모습이다.
--- p.100
한진 시기 누란?영반 지역은 중원에서 서역으로 통하는 중요한 노선인 ‘누란도(樓蘭道)’의 요충지였다. 다양한 차원에서, 중원 둔수병은 이곳에서 주둔하면서 방어를 담당하고, 중원 사신 등은 이곳을 분주히 오갔다. 일부 둔전병리(屯田兵吏)?사신 혹은 한지 상인이 객사하거나 전사하여 매장될 때, 한의 전통 장례습속에 따라 매장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이곳에 문화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 장례풍속, 즉 명의 수장(隨葬)이 존재하는 것은 정상적이다.
--- p.129
“범어잡명”에서는 “호”를 한자로 “소리(蘇?)”, 인도의 실담문자(브라흐미 문자)로 Sul?, 일본의 가타카나로 “ソリ(소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은 “蘇?=Sul?=ソリ”는 수그딕(Su?δik)의 범어형의 한자 음사이며 그것이 “소그드”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 수그딕(Su?δik)은 돌궐?위구르 시대의 고대 투르크어 비문에서는 수그닥(Su?daq)으로 나타난다. 더구나 이 비문에서는 고비 사막 이남의 오르도스 지방에 있던 소그드인 집단인 “육주호(六州胡)”를 알티 추브 수그닥(Alti ?uv Su?daq)으로 번역하고 있다. 알티는 “육(六)”을 의미하고 추브는 “주(州)”의 음사이므로 여기에서도 “호=소그드인”이라는 등식을 얻을 수 있다.
--- p.136
“카루나푼다리카”의 고행 부분을 읽으며, 필자는 이 부분의 작자가 라호르 박물관의 불상과 같이 붓다의 고행을 묘사한 훌륭한 조형 이미지를 실제로 보았거나, 적어도 그런 상에 대해 들은 바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카루나푼다리카”의 최초 원본이나, 혹은 그에 상응하는 별경들이 존재했다 해도 그 연대가 간다라의 고행상들보다 올라간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에(여기서도 필자는 텍스트와 이미지의 관계에서 시간의 선후 정도만을 더듬고 있을 뿐이다), 간다라의 조형 이미지들이 “카루나푼다리카”의 서술을 따른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 p.178
“Yogalehrbuch”와 한역 경전이 유사한 요소를 많이 공유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전들의 전반적인 구조는 완전히 다르다. 즉 유사한 이미지가 경전 내의 다른 맥락에서 다른 순서대로 등장하는 것이다. 한편 유사한 이미지들의 대부분은 매우 특징적인 것들로서 그 유사성이 우연의 결과라고는 하기 어렵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Yogalehrbuch”가 편찬된 시기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그 시기를 확정지을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매우 발달된 단계의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아마도 한역 경전보다 다소 늦게 만들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한역 경전이 “Yogalehrbuch”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들 경전은 유사한 요소를 매우 공유하고 있지만, 그 연관관계는 단순히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 p.221
<탄압에서 통합으로: 몽골의 불교 전파 과정>
그러나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신앙이 강제적인 조치만으로 일시에 폐기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처음부터 샤머니즘을 비롯한 전통신앙과 관습을 적극 수용하고 불교 체계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나 전통신앙 모두 상대에게 용인될 정도로 변화를 겪었다. 여기에서 이른바 두 집단 간의 화해가 이루어지는데, 몽골 초원 곳곳에 보리수가 만발한 시기에 편찬된 『할하 법전』에 불교 관련 법규가 정비되어 있는 것과 달리 샤며니즘 규제 법규가 전혀 없는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보면 『할하 법전』의 종교 신앙 관련 공정은 두 종교의 통합과 화해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떻든 몽골을 불교 전파 과정은 전체적으로 전통신앙에 대한 탄압에서 통합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몽골 불교사의 커다란 특징의 하나이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