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화가들은 요즘 사람들 너무 그림 볼 줄 모른다고 남탓을 하지만, 그림을 그림 그 자체로 재밌게 다가가 볼 수 없게 만든 사람들은 결국 그들 자신이 아닌가 합니다. 화가는 어려운 그림을 그려서 척 걸어두고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 그림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감상자에게 묻습니다.
"당신 지금 알고나 보는겁니까? 나의 심오한 뜻을?"
그림을 시대의 사조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감각의 차원으로만 이해하려는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 혹시 이 그림 거꾸로 걸어놓으신 건 아닌가요?"
그러면 낙담한 화가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겠지요. 그리곤 화장실을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가서 볼일이나 보고 빨리 집에 가시란 소리겠지요.
감상자가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이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화가들은 발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말이야, 그림을 알기나 하고 보는 거얏?"
물론 칸딘스키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감상자에게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그림을 그려놓고 감상자들을 테스트하려는 화가들도 있습니다. 거기에 말려들지 마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겠는 그림을 보고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실 필요는 없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여러분, 초심으로 돌아가볼까요? 추상화를 시작한 칸딘스키는 결코 사람들을 현혹시키거나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를 내놓고 "넌 모르지? 넌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르지?" 하려고 한 건 아니랍니다.
클래식 음악을 한두 번 듣고서 지겨워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최소한 몇 번 들어보고 왜 이 음악을 아름답다고 하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분명 그 음악을 이해해보려고 시도를 합니다.그렇게 노력하는 어느 순간엔가 도가 트이듯 음악 소리가 들리게 되지요.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휙, 한 번 보고는 "저게 뭐야?"하는 사람은 그림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제목도 모르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을 들으며 공연히 눈물지은 적이 없으셨나요? 그게 단조인지 장조인지, 콩나물을 도로 그렸는지 파로 그렸는지 몰라도 다가왔던 어떤 느낌. 추상화 역시 자꾸 들여다보면 리듬이 느겨질 겁니다. 그림이 그림으로서 표현하고자 하는 그림다운 리듬 말입니다.
언젠가 누군가에게 "저는 생선회를 못 먹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아주 안타까운 얼굴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세상에 그 좋은 걸! 한 번 시도라도 해보시지."
세상에 그 좋은 그림을!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기라도 하시지.
--- pp.150-153
약간 빗나간 예를 들긴 했지만,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청출어람이란 말에 얼마나 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과 같은 천재들이 미술의 영역에서 '모든걸 다 이루어놓아' 후배화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보이지요.
원근법은 이미 완성되었고, 신체의 이상적인 비례를 알아내기 위해 더 이상 해부학에 몰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알 만한 것은 다 알았으니, 그 시대의 화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승 베끼기 정도였습니다. 예를 들어 울퉁불퉁 튀어나온 근육의 생동감이라거나 다양한 포즈는 미켈란젤로를 따를 자가 없다고 생각해서 르네상스 후반기 화가들은 덮어놓고 미켈란젤로식으로 따라 그렸지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줄 아십니까?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또 변절자들에게 끌려가는 예수가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가진 남정네로 변신합니다.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모세의 기적'에 출현한 꼴이지요.
어쨌든 르네상스의 대가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던 어린 화가들은 그게 그림의 전체 분위기하고 맞고 안 맞고를 떠나 거의 맹목적으로 스승 베끼기에 열을 올립니다. 말하자면 영화의 전체 분위기나 스토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단지 배우가 예쁘거나 멋지거나 인기 있다는 이유 만으로 케스팅하는 것과 같지요.
그렇지만 어디서나 '삐딱이'들이 있는 법입니다. 베끼기가 난무하던 그 시기에 거기서 단호히 벗어나고자 한 이들이 있었지요. 그러니까 교실에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모범생들만 있는 게 아니라 '깻잎머리'에 눈썹 그리는 아이들도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또 사실 아무리 베껴봐야 스승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겝니다.
해도해도 안되는 이들이 택하는 비상구는 바로 삐딱선을 타는 일이지요.
"더이상 스승님이 가르쳐주는 대로 '범생이'처럼 그리라는 대로 안 그리련다! 내 개성대로 그리련다. 고전시대 그림처럼 멋있고 우아하지는 않지만 얼마나 내 스타일이 살아나는지 보라!" 이들은 전성기 르네상스의 조화와 이성 대신 감성과 상상력을 추구해서 사실주의적인 양식을 버립니다. 새로운 걸 시도하다 보니 그림이 구도나 표현 등에서 다소 불안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요. 르네상스가 끝나나고 바로크 양식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 과도적인 시기를 매너리즘 시대라고 부릅니다.
--- pp.115-117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사람은 몇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을까요? 살다보면 마음에 없이 미워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은 내키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거짓고백을 할 때도 있습니다.또 이게 아닌데,아닌데 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꾸 언짢은 모습만 보여주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자꾸 좋은 면만 부각시켜 그를 혼란케 합니다.이렇게 우리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라 열, 스물, 잘도 변하지요.
--- p.44---pp.1-6,---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나는 아름답다? 로댕의 나는 아름답다를 보세요. 세상을 다 들어올릴 듯 패기만만하고 사자도 쳐죽일 수 있을 것같이 근육이 단단한 남자가 번쩍 여자를 들어올리고 있습니다. '나는 아름답다'고 외치는 이가 여자를 들어올린 남자인지 남자의 팔 안에 웅크린채 매달려 있는 여자인지 궁금해집니다. 혹 이런 건가요? 남자는 저깟 여자 하나쯤은 번쩍 들어올릴 줄도, 내팽개칠 줄도 알아야 모름지기 아름다운 거라는....
--- p.
그림을 음미한다는 것은 보는 것과 읽는 것의 시소타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구잡이로 그려놓은 듯한 추상화의 화려하거나 튀는 색상이 어느 순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면, 그건 우리의 두 눈동자가 그 그림을 탐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고 나선 곰곰이 생각에 잠기게 되지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 p.250
"이게 누구셔? "
아이가 제목이 '엄마 얼굴'인 그림을 들고 옵니다.
긴 속눈썹과 새빨간 입술, 그리고 어디서 본 깜냥은 있어서 지 엄마 눈동자마저 영화배우 골디 혼처럼 초록색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머리칼은 긴 생머리에 갈색, 게대가 리본까지 커다랗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단발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토종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밋밋한 얼굴에 있는 둥 마는둥한 속눈썹.또한 게으름은 저의 영원한 친구이자 우상이라 십포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까워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입술에 립스틱도 잘 안바르고 다니지요.
"이게 엄마야? 너 진짜 이거 엄마라고 그렸어?"
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쳐다봅니다. 딸아이가 꿋꿋하게 대꾸합니다.
"그림은 이뻐야지, 그대로 그리면 밉잖아. 엄만 머리도 맨날 이상하게 하고 있구, 화장도 안 하잖아..."
딸아이의 말은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줍니다. 미술에서 흔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바탕을 둔 미술을 고전주의라고 하지요. 이걸 복잡하게 풀어놓으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정밀한 해석은 전문가들 밥 벌어먹고 살게 그냥 저는 단순화시켜서 얘기해보겠습니다.
고전주의는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예술과 자연에 의해 아름답게 만들어진 사물만이 인간을 즐겁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감화시켜 성품을 선하고 아름답게 한다"고 했지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밋밋하고 짧은 속눈썹의 엄마라는 현실과, 만화나 꿈, 영화에서 본 아름답고 고상한 여인이라는 이상의 조화. 고전주의를 김용옥 교수의 공자 끌어내리기 수준으로 내려서 생각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잇을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 조각품들을 자세히 보면 거의 다 얼굴이 비슷비슷하지요.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비슷한 몸매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또 하나같이 무표정합니다.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표정, 가장 이상적인 얼굴선을 위해 감정마저 지워버린 거지요.사실 그렇게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다못해 동그라미하고 선만 가지고 그리더라도 입술 끝만 올리면 웃는 얼굴이 되는데, 시종일관 무표정을 만들어낸다는 게 말입니다.
후일 로마인들은 물리적으로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결코 그 예술을 정복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베끼고 흡수하기에 바빴지요. 그들인 수없이 많은 그리스의 조각품들을 복사하고 복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조품들을 자기들이 정복한 세계에 전파시킴으로써 그리스 미술을 널리 알리는데 공을 세웠지요.
--- pp.257-258
"이게 누구셔? "
아이가 제목이 '엄마 얼굴'인 그림을 들고 옵니다.
긴 속눈썹과 새빨간 입술, 그리고 어디서 본 깜냥은 있어서 지 엄마 눈동자마저 영화배우 골디 혼처럼 초록색으로 그려 넣었습니다. 머리칼은 긴 생머리에 갈색, 게대가 리본까지 커다랗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지금 단발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토종 얼굴이 어디 가겠습니까? 밋밋한 얼굴에 있는 둥 마는둥한 속눈썹.또한 게으름은 저의 영원한 친구이자 우상이라 십포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아까워 어지간한 사건이 아니면 입술에 립스틱도 잘 안바르고 다니지요.
"이게 엄마야? 너 진짜 이거 엄마라고 그렸어?"
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이를 쳐다봅니다. 딸아이가 꿋꿋하게 대꾸합니다.
"그림은 이뻐야지, 그대로 그리면 밉잖아. 엄만 머리도 맨날 이상하게 하고 있구, 화장도 안 하잖아..."
딸아이의 말은 우리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고전주의 미술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줍니다. 미술에서 흔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바탕을 둔 미술을 고전주의라고 하지요. 이걸 복잡하게 풀어놓으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정밀한 해석은 전문가들 밥 벌어먹고 살게 그냥 저는 단순화시켜서 얘기해보겠습니다.
고전주의는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조화를 추구합니다.
플라톤은 『공화국』에서 "예술과 자연에 의해 아름답게 만들어진 사물만이 인간을 즐겁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감화시켜 성품을 선하고 아름답게 한다"고 했지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밋밋하고 짧은 속눈썹의 엄마라는 현실과, 만화나 꿈, 영화에서 본 아름답고 고상한 여인이라는 이상의 조화. 고전주의를 김용옥 교수의 공자 끌어내리기 수준으로 내려서 생각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잇을 겁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 조각품들을 자세히 보면 거의 다 얼굴이 비슷비슷하지요.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에 상관없이 비슷한 몸매와 얼굴을 하고 있으며, 또 하나같이 무표정합니다.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표정, 가장 이상적인 얼굴선을 위해 감정마저 지워버린 거지요.사실 그렇게 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다못해 동그라미하고 선만 가지고 그리더라도 입술 끝만 올리면 웃는 얼굴이 되는데, 시종일관 무표정을 만들어낸다는 게 말입니다.
후일 로마인들은 물리적으로는 그리스를 정복했지만 결코 그 예술을 정복하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베끼고 흡수하기에 바빴지요. 그들인 수없이 많은 그리스의 조각품들을 복사하고 복제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조품들을 자기들이 정복한 세계에 전파시킴으로써 그리스 미술을 널리 알리는데 공을 세웠지요.
--- pp.257-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