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는 좌파의 (정치학이 아니라) 미학에서 상당한 업적을 쌓았고 또 영향력을 떨쳤지만 음악 분야로 볼때 그의 공헌은 쇤베르크의 현대음악을 전적으로 옹호하고 재즈 음악을 '일체 상업주의'로 몰아붙였던 그 (정치적) 과격성이 아니라 오히려 슈베르트의 작품, 특히 만년작들을 위대한 예술로 떠받쳐 올린 데서 더 빛을 발한다. 사실, 쇤베르크의 기법을 구사한 그의 음악 창작물은 일종의 추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거나, 그런 아도르노의 '철학-미학적' 슈베르트의 해석을 그대로 연주로써 재현하는 것이 리히테르다. 그의 철학-낭만주의적 해석을 머금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1번>은 슈베르트를 가장 위대한 실내악 작곡가의 위치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순서는 거꾸로다. 리히테르는 슬픔 속으로 슬픔 너머를 세운다. 눈물을 지나 눈물의 부패까지 지나, 엄격한, 그리고 엄격해서 아름다운 철학의, 아름다움의 계단이 세워지고 그것이 아도르노의 이론적 순결성과 겹쳐진다. 그때 리히테르 또한 사회주의-좌파다. 물론 음악적으로, 그리고 (음악의) 현실 영역이므로 다소 보수적인. 그의 연주가, 동향 러시아 작곡가들은 물론, 고전적 낭만주의 음악에서 특히 고결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 pp. 358-359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시선. 아버지의 시선, 별의 시선, 천사들의 시선, 성모의 시선, 자신의 육화를 바라보는 성자의 시선, 영원을 품은 시간의 시선... 이 모든 지상과 천상, 순간과 영원, 성과 속의, 육체와 영혼의 시선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음악이 바로 그 시선들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다. 위 음반이 그 증거다. 그러므로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가지 시선>과, 함께 수록된 <전주곡들>이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베로프의 연주에서는 특히. 의미로 충만된 음악이 아니라 음악으로 충만된 의미.
--- p.491
1. 베토벤이, 후기-만년 현악 4중주들의 '위대한 치매'에 이르기가지 음악의 전 생애에 걸쳐 썼던 피아노 소나타 32곡은 가장 격동적인 음악의 생애가 가장 명징하게 드러나는 광경이다. 격동의 명징화. 32곡 전곡을 마음의 귀로 상상한다면 우리는 사람이 죽기 직전 전 생애의 광경이 한순간에 펼쳐진다는 그 시간의 광경화로서 영원을 감잡을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벌써 넘실대는, 위대한 위안으로서, 소란스러운, 격동하는 죽음의 이면인 아름다움을 접할 수 있다. 이 점은 그야말로 고단한 격분과 열정, 그리고 뼈를 깎는 탐구와 웅혼한 모험정신으로 생애를 일관했던 베토벤 자신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특히 거대한 교향곡풍의 구조를 갖춘 op.106 이후에, 비교적 간명한 형태로 마지막 세곡이 이어지고 그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즉 32번 소나타가 단 2악장의 짧은 작품으로, 더군다나 '자그마한 노래'라는 뜻의 아리에타로, 정말 순정무구하고 단정하고 소박한 가락으로 끝나는 의미가 바로 그것에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귀가 먼 베토벤이 알았을 리 없지만, 후기-만년 현악 4중주의 그 위대한 죽음 탐험, 아니 죽음과의 음악-이성적인 몸섞기의, 투명할 수록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을 터. 아니 좀더 밀접하게, 치매의 음악이 현실 속으로 그 늙음의 아름다움의 육체를 들이미는 통로, 아니 육화의 통로로 작용했을 것이다. 마치, 이제와서, 그것을 위해 생애가 그토록 격동했고 격동이 그토록 명징했다는 것처럼.
--- pp.523-524
1 .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세 겹 현음이 겹쳐 전설 같은 안개가 형성된다. 마치 시작은 시간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듯이. 비장(悲壯)이 낮고 무겁다.
그러나 짧다. 선율이 잠시 흐르다가 흩어질 틈도 없이 현악기들이 갈라진다. 바이올린은 길길이 치솟고 첼로는 둔중하게 깔리고, 비올라는 양지를 수숩지 못한다, 무언가 찢어진다. 바이올린 음이 제 스스로 분리되어, 하나가 아니고 둘이다. 아니 여럿이다. 첼로 음은 무거운 채로 균열되고...
음악은 그렇게 흐느낌의 생애를 시작한다. 현악 5중주 D. 956번. 슈베르트는 이 작품을 생애 마지막 유언으로 썼다. 1827년 3월 29일 베토벤 장례식에서 그는 관을 옮겼다. (중략)
3. 슈베르트는, 아니 음악은 그 운명을 알고, 오로지 아름다움으로써 감내하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2악장 아다지오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1악장의 서두, '공간화했던 시간'이 장중한 주(主) 선율로 흐르고 제1바이올린과 첼로 음이 묻어난다. 그 묻어남은 정확히 눈물의, 시야 흐릿함과 자체 영롱함을 그대로 닮았다.
그렇다. 눈물은 언제나 생애의 광경에 묻어난다. 그것이 광경을 흐리지만 음악은 손에 잡히지 않고 귀에 들리고 귀는 마음에 가장 가깝고 그렇게 기억의 최대 광경이 음악의 선율로 액정화되고 흐른다.
귀가 광경을 보고 눈이 선율을 듣는다. 위대한 미완성, 위대한 미완성...미완성이므로 더욱 감동적인 그러므로 몸은 지상을 떠나되 음악은 역사 속으로 스며드는, 그렇게, 미완성이므로 영원히 이어지고 포괄하는 순간이다.
물론 모든 예술이 그렇다. 상상력은 손에 잡히지 않고 무한한 광경을 펼친다. 조각예술조차, 우리가 손으로 만지기 전에, 얼마나 무수한 광경을 펼치고 있는가. 다만 음악은, 그 사실을 다시 예술의 시간으로 가시화(可視化)하며 흐른다.
--- pp.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