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서양 중세사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것을 1970년대 초엽의 일이고, 이 책과 유사한 체제의 연구서를 구상한 것은 80년대 후엽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이 한 역사학도가 가지게 된 문제의식의 산물이라면, 그 문제의식은 1970년대와 80년대에 현성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별들도 빛을 잃었던 1970~80년대에 우리 사회에 대한 애정을 숨죽여 가며 내연시켰던 모든 이들의 절실한 화두는 민주화였다. 따라서 필자가 우리 사회의 이 시대적 요구를 어떻게 하면 중세사학도의 학문정신으로 여과해 낼 수 있을까 하는 작업동기를 가지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필자는 서양 중세 정치사상에 관한 나름의 절실한 지적 탐구열에도 불구하고, 서양 중세사학계의 학문적 동향은 물론 연구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본적인 시각이나 인식의 지평도 가지지 못한 상태ㅇㅆ다. 그리하여 중세의 복잡 다기한 정치적 논술들을 읽고, 이를 필자의 독자적 역사의식으로 정제해 내는 작업이 요원하게만 느껴졌으며, 이로 인한 방황 또한 적지 않게 경험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필자의 지적 방황에 새로운 학문적 희망과 시야를 열어 준 이가 중세 인민주의(medieval populism)라는 정치사상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영국의 중세 사학자 울만(W. Ullmann)이었다.
당시까지 서양 중세 정치사학의 주제는 보편주의 지배이데올로기 대 분권적인 봉건적 현실이라는 이원적 정치구조 및 이를 토대로 출현한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 과정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학문적 논의의 지평도 교황권, 제국, 봉건적 정치 질서 내지 세속국가 등에 머물러 있었다. 이에 비해 울만은 정치사상사의 극히 기본적인 주제이면서도, 중세의 정치적 논술들에 관한 한 오랫동안 직접적으로는 규명되지 않았던 정치 권력의 원천 내지 그 소재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였다. 사실 중세의 정치적 논술들은 거의 예외 없이 '신은 인간을 매개로 일한다'는 그리스도교적 명제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신의 뜻을 이 땅에서 주권적으로 매개하는 '정치적 인간'을 누구로 그리고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여기서 울만은 방대하기 짝이 없는 이 시기의 정치적 견해들에서 정치 주권체에 대한 중세적 인식의 변화를 포착하여, 외형상의 신정적 정치 원리로부터 인민주의적 정치 원리의 형성 궤적을 추적하였던 것이다. 울만의 이 같은 작업은, 명백한 한계와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는 중세 정치사상에 관한 새로운 접근 모델과 학문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로부터 생경하기만 했던 중세 인민주의 정치사상에 대한 해명 작업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 열망을 학문정신으로 여과해 보고 싶었던 한 중세사학도의 정신적 지평이 되었다.
이 책은 지난 20여 년에 걸쳐 여기저기에 실은 글들을 모아서 정리한 것이다. 글을 쓴 순서에 따라 이 책의 구성을 간략이 정리해 둔다. 먼저 4장 '중세 정치의식의 유형'은 대체로 80년대 초엽에 집필된 것들로서, 이는 중세의 정치적 논술들을 파악하는 필자 나름의 지적 패러다임을 형성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행여나 이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감히 여기에 싣게 되었다.
그리고 3장 '윌리엄 오캄의 정치사상'은 필자의 학위논문 주제이기도 했던바, 주로 80년대 중엽에 집필되었다. 오캄의 유명론(nominaism)이 철학 및 신학사상에서 점하는 의의와 비중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활발한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견해의 성격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규명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필자는 오캄을 중세 말의 시대정신을 해명하는 한 중요한 통로로 간주하고, 정치사상사에서 점하는 그의 위치를 설정해 보고자 하였다. 오캄의 정치적 견해의 성격을 개체주의적 인민주의(individualistic populism)로 해석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도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던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두려움이 앞선다. '정치적 오캄주의에 관한 보다 설득력 있는 재구성은 앞으로의 과제이다'라고 했던 맥그레이드의 지적이 여전히 유용함은 이를 나위가 없다.
다음으로 2장 '마르실리우스 파두아의 정치사상'은 주로 90년대에 집필되었다. 마르실리우스는 중세 정치 이론가들 가운데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적인 반교황적 속권주의자이며, 중세 인민주의의 기수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필자는 마르실리우스의 정치적 견해를, 오캄의 그것과 대비시켜, '일종의 인민주의' 즉 전체주의적 인민주의(totalitarian populism)로 해석하였다. 사실 교권이 지배하는 사회에 대한 마르실리우스의 공격은 자본제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공격만큼이나 전면적이고 철저한 것이었다. 따라서 필자가 제시한 마르실리우스 분석의 보편적 타당성 여부에 대한 평가는 모름지기 독자들의 몫이다.
끝으로 1장 '용어 해설'은 서양 중세 정치사상에 관한 국내 학계의 학문적 논의가 충분하지 못한 실정임을 감안하여, 이 책에서 다루게 될 용어의 개념을 미리 한정해 둔 것이다. 이는 비단 정치사상의 분야뿐만 아니라 서양 중세사 전반에 있어서도 우리 나름의 학문적 언어와 수단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부족하나마 이 시론적 시도가 중세사학의 용어와 개념의 문제에 관한 보다 심층적인 논의를 낳아서, 서양 중세사학의 기초가 건설적으로 다져지는 한 단서가 된다면 그것은 기대 이상의 성과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