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안엔 몇 개의 줄이 있을까.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생명의 줄은 저마다 다르다. 기타가 여섯 줄, 가야금이 열두 줄, 마흔 여섯 개의 현을 가진 하프도 있다. 질긴 가죽을 실컷 두들겨 맞아도 끄떡없는 드럼이나 눈부신 금속으로 튼튼하게 태어난 트럼펫, 또는 피아노처럼 다양한 절대 음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가끔 조율을 필요로 할 뿐인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언제 끊어질지 알 수 없는, 그리고 매번 스스로 최적의 음을 정확히 짚어내야만 하는 현악기 같은 운명을 살아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칼」중에서
사랑의 잔인성은 동시에 시작하지 않고 동시에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같은 회전판 위의 목마를 함께 즐거워했을지라도 폐장시간에 나란히 손잡고 퇴장할 수 있는 사랑의 확률은 얼마나 될까. 침대를 함께 쓰는 사이가 되기 전에 K는 오래된 연인과의 이별을 모색 중이었다. K는 내게 X-연인이 덜 상처받는 이별법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별을 결심했다면 톱질하지 말고 단칼에 베어버려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덜렁거리지 않게, 너덜거리지 않게, 그것이 목을 베는 망나니가 베풀어야 하는 자비다. -「달, 컴포지션7」중에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서로의 눈을 바라볼 수조차 없을 만큼 가까운 사이. 손 내밀어 잡을 수 없을 만큼 너무 내밀한 사이. 사랑이란 반드시 간격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다가갈 빈 공간이 없다는 것은, 너무 먼 단과 나처럼 대화도 섹스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먼 사이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너무 멀어서, 혹은 너무 가까워서 사랑은 가끔 참을 수 없이 슬프다. ---「거울의 방」중에서
넌 꿈이 뭐야? 샤워를 마치고 나와 옷을 입는데 주원이 묻는다. 꿈? 넌 아직도 꿈을 꾸니? 어이없는 그의 질문에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린다. 꿈을 꾸지 않는 건 죽은 사람뿐이야, 라고 주원이 말한다. 그럼 난 벌써 오래전에 죽었어. 내가 중얼거리며 꼼꼼히 화장을 고친다. 꿈이란 말이 남의 나라 말처럼 낯설게 들린다. 그러나 서른셋. 아직 꿈을 꿀 나이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당연히. 널 다시 만나고 나서 태어나 처음으로 꿈이 생겼어. 꿈을 생각할 때마다 심장이 마구 뛰어. 나는 흠칫 그를 돌아본다. 그의 표정이 꼭 일곱 살 사내아이 같다. ---「내 남자의 꿈」중에서
남편은 요즘 들어 일찍 귀가했다. 달밤에 스텝을 밟지도 않았고 더 이상 들뜬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둘째 아들놈이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며 풀죽어 말할 때 딱 그 표정이었다. 달려가서 등짝을 패주고 싶었다. 나쁜 년, 좋다고 춤 출 때는 언제고! 미금은 왜 남편이 아니라 함께 춤추던 여자에게 화가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북어」중에서
온갖 생존 위협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 당신과 내가 있다.
그러나 생존자에게도 행성에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고, 소통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사랑에 대한 열망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살아내는 건 투쟁이다. 그러므로 우주의 유전자를 진화시키는 임무를 수행하느라 오늘도 땀나게 뛰고 있는 당신은 나의 위대한 동지이다. 때로 당신이 아플 때, 당신이 울고 싶을 때 당신을 위로하는 것들-철학과 종교, 음악과 미술, 의학과 과학, 경제와 문화, 그리고 수많은 소설과 시-그 분주하고 촘촘한 시간 속에서 잠깐만이라도, 내가 쓴 글 한 줄이 당신의 심장을 따사롭게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좋겠다.
오늘도 살아남은 지구인,
당신을 사랑한다.
-「작가 후기」중에서
2010년 첫 소설집을 냈다. 등단작이 포함된 11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칼』이 나온 뒤, 나는 다시 은둔 모드로 들어갔다. 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툰 사람들이 글을 쓴다. 그래도 숨 쉴 구멍은 필요해서 블로그에 영화 보고 책 읽은 것들을 끼적거렸다. 새로 쓴 단편소설도 몇 편 연재식으로 올렸다. 하나둘 이웃이 생겼다. 『칼』을 찾아 읽고 포스팅 해주는 분들이 생겨났다.
작가란 나르시시즘 환자들인지도 모른다. 마음에는 다 자라지 못한 아이가 남아 있어서 작품이 좋다는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듯-안 그런 척하지만-잠시 천국을 엿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 힘으로 글을 쓴다.
다시 퇴고를 하다 보니 몇 군데 수정한 부분이 생겼다. 평론가나 작가, 문인들의 추천 글을 싣는 대신 허락을 얻어 서평을 실었다. 독자들과 함께하는 책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
---「재출간에 즈음하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