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이 믿는 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신이라 믿으며, 그들이 믿는 신앙의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합리적이지 못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인가? 등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들은 구원파만의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 정치평론가는 구원파의 행태는 우리 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좀 더 강한 톤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 기독교는 이미 맘몬(Mammon)을 숭상하는 물신숭배의 종교 단체로 변한 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에 자유로울 수 있는 교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글쓴이는 이러한 지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신에 대한 올바른 시야를 확보하고 올바른 종교관을 모색해보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글쓴이는 ‘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 ‘참된 종교는 어떤 모습인가?’ 등과 같은 명제에 그 답을 찾아보는 심정으로 이 글을 시작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각 시대마다, 신학자나 종교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달리 정의 내려지곤 했다. 정의 내려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바른 정의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사실 신과 같은 실재는 인간의 언어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p.15
진정한 종교 담화는 명료하고 경험적으로 입증되는 진리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브라흐만처럼 아트만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무언가를 정의하려면 그것을 우리 자신과 분리해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전체(브라흐만)가 한 개인의 자아(아트만)가 되었을 때 누가 어떻게 그것을 볼 수 있으며 누가 어떻게 그것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가장 참된 자아가 브라흐만과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 역시 모든 것(배고픔과 목마름, 슬픔과 망상, 늙음과 죽음 등)을 초월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인간의 이성적 논리로는 이런 통찰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일상의 자아를 초월한 사고로 길고 힘들고 헌신적인 수련의 과정을 통하여 도달하게 된다.
당시 이러한 무아에 이르게 해주는 주요 기술의 하나가 ‘요가’(Yoga)였다.--- p.23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제국건설과 붕괴 이후의 헬레니즘 시대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였기 때문에 헬레니즘 철학은 주로 내면의 평화를 함양하는 일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대표적으로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는 아테네 외곽 아카데미아 근처에 공동체를 설립해 그곳에서 제자들이 내면의 동요를 겪지 않고 검소한 은둔생활을 할 수 있게 했다. 같은 시기 스토아학파의 제논(Zenon, B.C. 342-270)도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아타락시아(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의 철학을 역설하였다. 즉 절제되고 냉철한 생활과 명상을 통해 완전한 평정심에 이르고자 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이 스토아학파나 에피쿠로스학파 모두 기본적으로 영성수련을 통해 아타락시아의 평화와 지적인 깨우침을 얻으리라는 희망 속에서 진정한 철학적 삶을 살았다. 그들의 철학적 삶은 곧 영적인 삶이었으며 신성성과 연결되는 고귀한 삶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합리주의는 결코 종교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그 자체가 대다수 종교 전통의 원리들을 나름대로 독특하게 발전시킨 또 다른 믿음의 전통이었다.--- p.46
플라톤주의자 오리게네스는 우주를 관상함으로써 신을 알 수 있다고 믿었고, 기독교인의 삶을 사후에도 영혼이 신성과 완전히 동화될 때까지 지속되는 플라톤적 상승으로 여겼다. 신플라톤주의자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는 빛이 태양으로부터 오듯이 우주는 신으로부터 영원히 유출되는 것이므로 물질세계란 신의 존재가 흘러넘친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주를 명상하는 것은 곧 신에 관해 명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4세기에 이르자 사람들은 우주와 신 사이에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거대한 틈이 생겼다고 느끼
기 시작했다. ‘무의 가능성’이 인간 존재의 시작과 끝 양쪽에 위협적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p.61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5-1457) 같은 사람은 신성한 진리를 변증법적, 형이상학적으로 따지고 드는 것은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고 주장했다. 인본주의자들은 ‘신학은 사실에 관한 시’(詩)이며 무언가를 증명해서가 아니라 가슴에 와 닫기 때문에 유효하다고 한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F. Petrarca, 1304-1374)의 말처럼 감동을 주는 종교를 원했다.
인본주의자들은 특히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감성적인 영성에 끌렸고, 그들을 교리적 권위자로서만이 아니라 대단히 개인적이고 감성적인 탐구에 착수한 자신들과 비슷한 개인으로서 숭배했다. 인본주의자들은 근대적 성격에 결정적 요소가 된 ‘개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집단적, 사회적 혹은 교조적인 낡은 사고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만이 자유롭게 혁신하고, 대담하게 실험하고,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고, 실수를 무릅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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