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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과 사기

사마천과 사기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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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10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400쪽 | 454g | 135*195*25mm
ISBN13 9788994054766
ISBN10 8994054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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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양치엔쿤
楊乾坤
문학과 역사에 두루 능통한 작가이자 학자로 1947년 시안(西安) 린통(臨潼)에서 태어났다. 오랫동안 산시공인일보사(陝西工人日報社)에서 재직하면서 편집주간을 맡기도 하였고, 산시성(陝西省) 잡문학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각종 지면에 발표한 작품이 모두 2백만 자에 달하며, 잡문집인 [포고집(布鼓集)]과 전문서적인 [중국고대문자옥(中國古代文字獄)] 및 [전당오대시(全唐五代詩)]를 출간하였다. 이 중 [중국고대문자옥]은 산시성 정부에서 수여하는 학술상을 받았다. 최근 고금의 유명한 연구(聯句)를 모은 [영련취화(楹聯趣話)]를 펴냈다.
역자 : 장세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주희 시 연구])를 취득하였다. 영남대학교 겸임교수와 경북대학교 연구초빙교수를 거쳐 지금은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의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3년 대구매일신문에서 선정한 대구·경북지역 인문사회분야의 뉴리더 10인에 포함된 바 있다.
저서로는 [이미지로 읽는 한자](연암서가, 2015)가 있고, 역서로는 [한학 연구의 길잡이(古籍導讀)](이회문화사, 1998), [초당시(初唐詩, The Poetry of the Early T’ang)](Stephen Owen, 中文出版社, 2000), [퇴계 시 풀이·1∼6](이장우 공역,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2011), [고문진보?전집](황견 편, 공역, 을유문화사, 2001), [朱熹 詩 譯註·1∼2](이회문화사, 2004~2006), [퇴계잡영](공역, 연암서가, 2009), [唐宋八大家文抄-蘇洵](공역, 전통문화연구회, 2012), [춘추좌전·상](을유문화사, 2012), [춘추좌전·중](을유문화사, 2013), [춘추좌전·하](을유문화사, 2013), [도산잡영](공역, 연암서가, 2013), [주자시 100선](연암서가, 201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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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사마천의 일생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특히 『사기』에 대한 다각적이고 집중적인 분석이 돋보인다. 저자는 이 책을 모두 8장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각 장의 제목은 사마천의 고향인 한성에 있는 사마천사의 비석(모두 65개) 가운데 궈모뤄(郭沫若)가 사마천을 찬양한 오언율시의 한 구절씩으로 삼아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였다. 사마천 개인사에 관련된 서술은 『사기』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책의 앞쪽에 서술하였고, 『사기』가 이루어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은 뒤쪽에다 배치를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사마천의 죽음에 대해 여러 가지 자료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그 원인과 죽은 연도 등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 인상적이다. 기존의 사마천 사적 연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성취가 있다고 생각된다. 중간 부분은 『사기』를 읽는 데 이해를 돕기 위한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 p.7

『사기』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각고의 노력과 의외의 변수가 크게 작용하였다. 부친 사마담의 뜻하지 않은 죽음과 유언은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릉의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속량할 돈이 없었던 사마천. 그는 사형을 면하기 위하여 목숨과도 같은 남성성까지 포기해야 했다. 그로 인해 만인의 조롱을 받는 치욕스런 형벌인 궁형을 받게 된 것은 모두 『사기』를 완성하고자 한 일념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으로 인하여 『사기』는 더욱 처절하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다.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사태였으나 궁형이 가져다준 발분(發憤)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획기적인 역사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전의 역사가 귀족 중심의 서술이었던 것에 비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사기』에 평민이 등장을 하게 된 것 또한 여기서 기인할 것이다. 이런 민중을 중심으로 한 사관 덕분에 『사기』는 후세에 더욱 각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 p.9

사마천은 하양(夏陽)에서 출생했다. 다만 그 스스로는 출생지를 하양이라 하지 않고 용문(龍門)이라 하였는데 이는 깊은 의미가 있다. 용문은 『상서·우공(禹貢)』에 기록되어 있는 고대의 명산이 다. 또한 용문은 하양의 경계에 있으며 황하의 동서 양안을 끼고 있어 형세가 궁궐의 문과 같다. “양쪽 벼랑이 모두 산을 깎아놓은 듯한 절벽으로 문처럼 마주하고 있으며 신령한 용만이 뛰어넘을 수 있으므로 용문이라고 한다”는 내용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황하는 북에서 남으로, 협곡에서는 물이 여울져 급히 흐른다. 용문을 뚫고 지나간 후에는 들판으로 들어가 갑자기 가로로 강폭이 넓어진다. 남쪽으로 흘러내려서는 곧장 화산(華山)을 통과한 후 큰 물결을 이루며 동해로 흘러든다. --- p.29

사마천의 총명함은 훌륭한 가정환경 속에서 더욱 발휘된다. 훌륭한 유년기 교육을 받아들이면서 집안에서 집중적으로 익힌 덕분에 10세에 고문을 줄줄 욀 정도가 되었다. 『좌전(左傳)』과 『국어(國語)』, 『세본(世本)』 등의 고문 사적(史籍)을 읽어내는 것은 물론, 제자(諸子)의 문장 및 『시경』의 몇몇 편장들도 읽어내게 되었다. 후에 태사령이 된 부친을 따라 장안에서 살게 되면서 배움의 영역이 넓어졌다. 문학과 경학의 대사들과 접촉하면서 좋은 독서와 학습의 기회가 더 많이 생겼을 것은 당연하다. 나중 몇 년간은 동중서와 공안국이라는 두 큰 스승의 문하에서 『춘추』 및 유가의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 p.48

큰 뜻을 품은 사마천은 20세까지 만권의 책을 읽었다. 또한 그 부친인 사마담의 배려로 몇 년에 걸친 여행길에 올랐다. 이는 경력의 대대적인 증가와 더해지는 직무에 앞서 점점 큰일을 감당할 역할, 즉 나중에 『사기』를 짓는 데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귀 중한 전기(前期)의 준비과정이 된다. 과연 출사한 사마천은 매사에 송곳 끝이 튀어나오듯 뛰어난 면을 드러냈다. 한무제는 그가 이미 당시의 많은 “분별력과 식견이 빼어나고 문사가 넘치는” 저명한 인물의 하나로 인식한 것이다. 무제는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때나 변방의 행차에나 늘 그를 따르게 했다. 이처럼 늘 황제의 주변에 있다 보니 식견이 더욱 넓어졌다. 태사령직을 맡게 되자 본업 외에도 동료인 호수(壺遂) 등과 역법을 수정하여 유명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도 가담하게 되었다. 사마천은 풍부한 학식과 강렬한 사명감으로 우뚝 일어서 거인의 기준에 닿기까지 매진했다. --- p.39

역사를 편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상황에서도 사마담은 아들인 사마천의 장래만 생각했다. 장차 사관을 맡을 관직에 종사하게끔 배양하는 데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매우 어렵고도 거창한 『사기』를 자신과 함께 완성하게 되기를 꿈꾸었다. 사마천이 10세 때 고문을 외고 나중에 또한 동중서와 공안국을 스승으로 모신 일 은 좋은 예다. 집안에서는 사마담에게 배워 10년의 학습과 연마를 거쳐 학업과 학술 조예 방면에서 신속한 향상을 보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불어 사마담은 사마천이 더 많은 감성적 지식을 얻기를 바랐다. 사회와 접촉하고 고대와 근대의 역사 고사 및 각종 사료를 얻게 배려했다. 또 사학가로서 안목을 넓히기 위하여 20세 때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배려로 목적성을 띤 여행을 시켰다. 이 여행에서 사마천은 한 가지 중요한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천하 각지의 도서를 모으는 것이 그것이다. --- p.40

사마천은 낭중이 된 후로 무제를 모셨다. 무제가 곳곳을 유람 하며 교사(郊祀: 종묘가 아닌 야외에서 올리는 제사)를 올릴 때면 그는 자연스레 그 자리에 끼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무제는 즉위 초기에 귀신을 공경하는 제사를 많이 올렸다. 사마천이 낭중이 되기 몇 년 전에 무제는 수차례나 옹(雍) 땅으로 가서 오제(五帝)에게 올리는 사전(祀典)을 거행하였다. 그 후로는 늘 3년에 한 번씩 교사(郊祀)를 거행하였다. 그 가운데 처음으로 제사를 지낸 후의 10년을 제외하면 그는 내정을 다스리고 흉노에 대한 공격과 방어에 바빠 지방의 시찰을 떠나지 못하였으며 이후에는 종종 교사를 지냈다. 이를테면 원수 원년(B.C. 122) 겨울 10월에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五?)에서 제사를 지냈다. 흰 기린이 잡히자 상서로운 조짐으로 생각하여 「백린지가(白麟之歌)」를 짓고 아울러 연 호를 원수(元狩)로 바꾸었다. 원정 4년(B.C. 113) 겨울 10월에도 무제는 옹 땅으로 가서 오치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에 ‘지금 상제(上帝)는 나로 말미암아 친히 교제에 임하였지만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예제(禮制)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오가기도 했다. 결국 관부(官府)의 주관자와 태사공 사마담, 예관(禮官) 동중서 등이 의논 끝에 못 가운데에 있는 원구(?丘: 못 가운데 외형 이 둥글고 높은 작은 언덕만한 단 5개를 세웠다)에 후토사(后土祠)를 세우기로 했다. 이에 무제는 마침내 동쪽으로 가서 하양(夏陽)을 거쳐 분양(汾陽)으로 행차하였다. 이때부터 천자가 비로소 군국을 순시하였다. --- p.54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무제의 봉선의식의 전례를 매우 중시하였다. 무제를 호위하며 따르는 대열에 들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장 안에서 동으로 가던 중에 낙양에 이르러 사마담이 병을 얻게 된 것이다. 병든 몸으로 무제를 수행할 수가 없어서 부득이 그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봉선의식 전례에 참여할 수 없게 된 사마담의 가슴에는 울분과 번민이 가득 찼다. 그럴수록 병은 더욱 위중해져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아침에 저녁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때 아들 사마천은 사명을 받들고 서남이에 갔다가 돌아와 조정에 업무를 보고해야 했는데 무제는 이미 태산으로 간 뒤였다. 사마천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하락(河洛) 사이에서 부친인 사마담을 뵈었다. 중병을 앓는 사마담은 아 들 사마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 p.68

태사령에 임명되었을 때 사마천은 역사를 써내려갈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혜제 후로부터 문사경적의 서책이 모두 나와 조참 (曹參)이 갑공(蓋公)을 천거하여 황룡을 말했다. 가의(賈誼)와 조조(晁錯)는 한비(韓非)를 밝혔다. 공손홍도 유자 출신으로 세상에 나 아가 이름을 드날린 이래 백년에 걸친 천하의 유문과 고사(古事)가 태사공에게 모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원봉 연간에 봉선을 거행하고 태초 연간에 역법을 개혁한 것은 서한의 번성이 극에 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사마천이 성세를 몸소 만났다는 것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직접 태초의 역법 개혁에 참여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게다가 태사령에 임명된 지 5년째 되던 해, 곧 태초 원년(B.C. 104)에 그 부친의 뜻을 계승하여 이미 써내려가던 『사기』를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 해가 42세로 사마천의 나이 한창 때였다. --- p.86

사마천은 낭중으로 출사하였을 때부터 자기의 일에 매우 돈실하고 엄숙하게 임했다. 직무에 대해 마음 씀을 매우 삼갔고, 힘을 씀에는 매우 부지런하였다. 장기간 무제를 수행하고 궁궐을 드나들던 중에 그는 곧 동이를 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빈객들과 알고 지내는 것을 끊고 집안의 일도 잊은 채 밤낮으로 재주와 힘을 다하였다. 전심전력으로 관직의 일에 매진하여 무제에게 잘 보이기를 추구하였다. 그런 중에 뜻밖의 일이 터졌다. 이릉의 일이 생긴 것이다. 그 일로 그는 마침내 부형이라는 참사를 당하게 되어 『사기』의 집필은 당장 중단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 p.95

『사기』는 사마천의 정치 군사 문화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면 의 사상을 관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제 사상 또한 그 중심을 관통하고 있다. 이런 경제사상은 사마천이 홀로 우뚝 서서 행한 표지이자 획기적인 공헌이다. 그 이전의 사학에서는 경제 방면은 언급될 수 없었다. 그 후의 관찬 사서에서도 이 방면의 내용에 대해서는 그다지 세세하게 제기하고 있지 않다. 이른바 「식화지」 같은 것은 토지제도 및 징세(徵稅)에 대하여 거듭 말하고 있다. 「화식열전」의 이론 체계와 사상의 고도(高度) 또한 사마천이 집대성한 치생술(治生術)로 발전시키고 생산한, 경제사상으로 커다란 차별성이 있다. 사마천은 전에 없이 상업경제의 특징을 고찰하였다. 경제 및 정치와 도덕 민속간의 관계를 고찰하여 완정한 발전경제 이론을 제기하였다. 생산의 발전, 교환의 확대는 국가와 집을 부유하게 한다. 이런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경제사상은 『사기』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다. 사마천의 경제사상은 주로 「화식열전」과 「평준서」 등 몇 편에서 표현된다. 「화식열전」의 명칭은 식(殖)은 키우는 것이고, 화식(貨殖)은 재화(財貨)와 재리(財利)를 키운다는 뜻에서 취하였다. 「평준서」의 명칭은 관부(官府)의 물자를 융통하고 물가를 잡는 조치에서 따왔다. 곧 비싸면 팔고 싸면 사들임으로써 부유한 대상인들이 큰 이익을 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만물의 물가가 맹렬히 뛰지 못하게 하는 것이므로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심사상이다. 천하의 사물을 누르는 것을 평준(平準)이라고 한 다. 이런 면에서 「화식열전」과 「평준서」는 『사기』의 다른 편장과는 큰 차별이 있다. 「화식열전」은 여러 가지 설명과 논의를 섞어 가며 의론을 주로 한다. --- p.140

『사기』에서 내뿜은 민본주의란 광휘는 사마천의 탁월한 역사 인식의 체현이다. 그는 전대에 나온 사서들이 군왕과 경상(卿相), 장군과 대부 등 존귀한 자들을 위해 전기를 짓는 전통을 뒤집었다. 중하층 인물들을 위해 전기를 지어 그들이 재상이나 경대부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한 것이다. 백성들이 강포함에 반항하는 것을 동정하였는데 이는 그의 민본사상에 대한 발양이 큰 것이다. 제왕의 전제와 폭력사상에 대한 비판은 두려움이 없는 그의 담략(膽略)을 표현해 내고 있다. 그중에서 포폄을 하는가 하면 애증(愛憎)을 갖기도 하는 등 사마천의 손에서 나온 것은 백성의 마음에서 발원하였다. 이런 전형적인 인물들은 『사기』에서 매우 전형적으로 표현되었다. --- p.154

사서에서 인물을 기록하기는 쉬우나 그 인물에 생동감을 풍만하게 불어넣기는 어렵다. 즉, 인물을 훨훨 살아 있는 듯 묘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사기』는 다르다. 완벽하고 아름답게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었다. 『사기』에서는 호견법(互見法)을 처음으로 만들어내어 인물 형상을 특히 포만감 있고 생동감 있게 하였다. 절묘한 필치로 깎고 다듬어 재료의 취사를 가장 적절하게 하였으며 구성의 안배에도 장인(匠人)의 마음을 갖추었다. 세목(細目)의 묘사에 치중하여 주제를 돌출시켰으며 대대적으로 작품의 감응력을 증대시켰다. 세목의 묘사를 통하여 전형적인 환경 안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해내었다. 그 인물들은 부르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책 밖으로 툭 튀어나올 것 같다. 전대의 역사에 비하여 『사기』의 웅장하고 왕성한 기세는 탁월하여 볼 만하다. --- p.181

사마천은 『사기』의 인물 형상을 빚어내는 일에 창조적인 작업을 진행시켰다. 특정 환경에서 전형적인 인물을 재현했다. 모순과 충돌하는 가운데서 전형적인 인물을 펼쳐내고, 심리묘사에서 전 형적인 인물의 본질적인 특징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일단의 훨훨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의 형상을 빚어내는 데 온힘을 쏟았다. 이전 사서의 인물 형상의 단순하고 창백한 약점을 되돌려 인물의 정신을 풍부하게 하고 살아 있게 하였다. --- p.238

언어예술의 정점은 『사기』가 얻은 큰 성공의 중요한 한 요인이다. 문장을 이루는 언어가 적절한 문체를 터득하고 있다. 또한 서술 언어의 풍성함과 인물을 성격화하는 생생한 언어 구사력도 보인다. 서술하는 사이에 저자의 의견을 끼워 넣는 치밀함, 속담을 인용해 넣은 적절함도 놀랍다. 논찬이라는 독보적인 견해를 피력한 기준 등은 『사기』의 언어를 정확하고 정련되고 생동적이고 우미(優美)하게 만들었다. 오색찬란할 뿐만 아니라 호연지기까지 갖춘 덕분이다. 말이라는 일정한 법식을 갖춘 언어라는 정련되면서도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사기』가 세상에 전하게 되는 필연적 요소이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이라는 사학의 대가이자 문학 거장의 풍미이기도 하다. --- p.265

공자가 지은 『춘추』는 노나라의 사료에 근거하여 수찬한 것이다. 중국 최초의 편년 단대사로 노나라의 역사를 중심으로 연도 단위로 일을 기록하였다. 노은공 원년(B.C. 722, 周平王 49년)에 시작하여 노애공 14년(B.C. 481, 周敬王 39년)에서 끝이 나며 모두 242년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공자는 『춘추』를 지으면서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깎을 것은 깎아 난신적자를 두렵게 하였다. 사마천은 『춘추』는 위로는 삼왕(三王)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의 벼리를 변별하며 혐의를 구별하고 시비를 밝힌다, 어정쩡한 것을 바로잡고 훌륭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악한 것을 악하게 여긴다, 현자를 현명하게 여기고 불초한 자를 천하게 여기고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는다, 낡은 것을 수리하고 없어진 것을 일으키며 왕도의 근본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그의 『사기』 또한 『춘추』와 그 주된 취지가 같다. 과연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올바르게 돌리는 세상을 넓히는 저작이다. 이런 스스로의 믿음에 비추어 보았으므로 그는 아래와 같은 비교를 하게 되었다. --- p.328

요컨대 전사(全史)를 창시한 『사기』는 중국의 첫 번째 통사(通史)로 내용이 완정하고 구성이 주도면밀하다. 편년(編年)과 기사(紀事) 등 여러 역사 서술 방식의 장점을 모았으며 인물의 전기(傳紀)를 중심으로 하여 기전체(紀傳體)를 창시하였다. 이 역사의 새로운 체재(體裁)는 포괄한 것이 매우 넓고 형식이 주도면밀하며 역사와 사건의 서술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다. 이는 전에 없던 역사를 기술한 위대한 저작이자 또한 걸출한 문학의 명저로 후세의 사서와 문학의 전범이 되었다. 이에 대한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자 운을 달지 않은 「이소」이다”라는 노신의 평가는 매우 정확하다. 사마천은 『사기』를 위해 온 정력을 다 바쳤으며, 노래할 수도 울릴 수도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숭앙하고 존경하게 한다. 『사기』는 사마천으로 인하여 세상에 유명해졌고 사마천은 『사기』로 인하여 문화의 거인이 되었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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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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