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버지 영조라도 자칫 이 문제를 강압적으로 처리하려다가 정신이 불안정한 세자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 몰라 시간을 두고 조용히 해결하는 방향으로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이때 영조는 나이가 60세를 넘은 지 오래였고,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가까스로 회복하여 심신이 극도로 미약한 상태였다. 무수리를 어머니로 둔 영조는 혹시 자기 시대에 결국 나라가 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이 든 아버지 밑에서 무서운 질책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내고 있던 사도세자는 손녀 같은 궁녀를 취하는 등의 행태를 보이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반감이 싹트고도 있었다. 이른바 아버지 영조에 대한 두려움은 갖고 있었지만 존경하지는 않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20대 중반으로 패기 있고 무예가 출중한 사도세자는 효종처럼 북벌을 꿈꾸고 있었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가 주장하는 북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결국 북벌을 주장하는 사도세자가 집권하면 조선이 전쟁의 요동으로 빠져들고 국가의 안정이 위태로울까봐 이를 두려워하고 경고하고 나섰다. 특히 영조는 인조반정 때 든든한 지원을 해준 곳이 관서지방, 즉 평안도 지역의 병력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평안도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곡식은 중앙정부로 수송하지 않고 현지에서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결국 사도세자는 이곳에서 4개월을 몰래 머무르며 아버지 영조를 축출할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사도세자의 쿠데타 모의설이 제기되고 있었다. 또한 영조도 이러한 계획을 의심하고 사도세자가 한창 평양 일대를 유람하고 있을 때 대신들에게「반정일기」란 책을 읽어주면서 사도세자의 반역 음모를 공개적으로 경고하고 나섰다. --- pp.16-17「 제1장. 정조의 출생과 성장」중에서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휘말려 희생되었듯 정조 역시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 등에 집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삼가 했다. 영조 말기에 노론 일파는 탕평을 무력화 시키고 국정을 농단하면서 사도세자를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사태를 불안하게 지켜본 정조는 탕평과 개혁으로 정국을 주도해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1776년(정조즉위년) 3월 10일, 영조가 세상을 떠난 지 6일 만에 경희궁 숭정문에서 즉위한 정조는 대신들에게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다. 정조는 형식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지만 실질적으로는 비극적으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할아버지 영조와 한 약속을 깬 선포로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분명히 밝히겠다는 것이었고, 또한 아버지의 명예를 자식으로서 회복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할아버지 영조 때의 과오를 바로 잡겠다고 천명하고 나선 것이었다. 단순히 복수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역사적 과오를 수정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정조를 결사적으로 지켜온 홍국영·정민시 그리고 서명선 등 ‘동덕회’ 세력들에게는 그야말로 밝은 소식이었고, 정조의 등극을 필사적으로 저지한 정순왕후의 오빠 김구주 및 정후겸 세력과 외척 홍봉한·홍인한 세력들에게는 어두운 소식이었다. --- pp.43-44「제2장. 정조의 즉위」중에서
그러나 다시 송덕상, 문인방 등이 연루된 전국적 규모의 역모가 발각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이경래, 문인방 사건은 체제 전복을 꾀한 중대한 역모사건이었다. 이들은 정감록까지 거론하며 송덕상은 물론 그의 손자 송계유도 동참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이 역모사건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대소 신료들은 이 역모에 가담한 자들을 사형으로 엄하게 처벌할 것을 정조에게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대소 신료들을 설득하여 무조건 사형을 집행하기 보다는 이들을 깨우쳐 새로운 마음으로 국가에 충성하도록 조치할 것을 명했다.
“죄가 있는 자는 은혜를 생각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죄가 없는 자는 의심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혀 다 같이 새로운 교화 속에 들어가 이 경사의 기쁨을 함께 한다면 그들도 다행일 뿐 아니라 국가도 다행이다,”
정조는 엄하게 사형으로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대소 신료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관대하게 처리할 뜻을 밝혔다. 그리하여 정조는 송덕상만 처형하고 역모사건의 주모자 이경래, 문인방 등 관련자 모두에게 사형을 면하는 특별조치를 내렸다. 이처럼 홍국영과 송덕상이 정조의 정치 주도 세력에서 배제되고 난 뒤 그의 잔여 세력을 관대히 처분하면서 가능한 이들을 최대한 포용하며 정국을 주도하려고 했다. 정조는 집권 초기에 홍국영을 내세워 많은 정적들을 제거해 왔다. 그리고 홍국영이 역모를 꾀하자 그 세력 또한 엄하게 벌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홍국영의 측근인 송덕상의 세력이 전국적인 규모로 역모를 꾸미고 나선 것이었다. 이에 정조는 사형 등으로 엄벌을 내리기보다는 날마다 늘어나는 죄인들에게 관용과 교화를 통해 화합의 정치를 펼쳐나가기로 하였다. --- pp.82-83「제3장. 개혁 정치와 역모사건」중에서
개혁정치와 탕평정치를 주도하던 채제공, 정약용 등의 세력이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던 노론 벽파 세력에게 급격하게 밀리면서 정치적 안정이 깨져가고 있었다. 이 당시 진산사건을 포함하여 해결해야 할 당면한 국정 현안 4가지를 담은 대사간 신기의 상소문을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초계문신 출신인 신기는 다음과 같이 상소를 올렸다.
첫째, 조정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탐관오리들이 전혀 법을 겁내지 않아 백성의 재물이 개인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갑니다.
둘째, 양반들의 풍속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명문거족들은 공적인모임이나 사적인 모임에서 남의 모범이 되는 행실이 없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서로 구제하려는 향악의 두터운 의리가 사라졌습니다.
셋째, 백성의 생계가 갈수록 궁핍해지고 있습니다. 부유한 자들은 베푸는 의리를 모르고 이웃과 친척들 간에 빌리고 빌려주는 길이 끊겼습니다.
넷째, 조정에 인품이 훌륭한 인재가 없습니다. 과거 시험과 문벌에 의존해서 벼슬을 제수하니 문장과 정사에서 그 인품과 벼슬이 서로 어울리는 인재들이 거의 없습니다.”
정조시대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천주교 등의 새로운 물결이 범람하고 탐관오리들이 발호하며 지방에서는 향악이 지켜지지 않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등 갈등이 쌓이기 시작했다. 또한 정조에 의해 등용된 개혁적 인재들이 죽거나 서서히 정계에서 몰락하고 있었다. --- pp.190-191「제6장. 정조의 죽음과 위대한 꿈」중에서
이윽고 어가는 만안현(상도동 고개)을 거쳐서 노량행궁에 도착했다. 정조는 혜경궁을 용양봉저장으로 맞아들이고 점심을 올렸다. 점심 수라를 든 다음 배다리를 관리한 주교도청 이홍운을 불러 혜경궁이 하사한 비단을 상으로 내렸다. 또한 노량별장에게도 음식을 하사했다. 그리고 배다리 건설의 총 책임자인 주교 당상 서용보를 불러 내일 당장 다리를 분해하여 선주들에게 돌려주라고 명했다. 그리고 20여 일 동안 기다리며 애를 태운 선주들에게 상을 내렸다. 용양봉저장에서 출발한 어가는 천천히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너 한양으로 향했다. 드디어 정조는 숭례문을 통과하여 돈화문, 진선문, 숙장문, 건양문, 동룡문, 경화문, 집례문, 승지문, 보정문, 만팔문, 천오문, 영춘문을 거쳐 창경궁 내전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8일간의 장엄한 화성행차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그가 간직했던 위대한 꿈을 실현한 것 같았다.
정조는 이러한 행사로 만백성을 단합시키는 계기를 마련하고 더 큰 목표를 향하여 개혁정치를 실천해 나갔다. 정조는 이듬해 1796년(정조20년) 1월에 현륭원을 다시 참배하고, 10월에는 신도시 화성 건설을 완료하였으며, 그 다음해 1797년(정조21년)부터는 1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현륭원을 방문하는 것인 관행이 되었다. 화성의 수리시설 건설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1798년(정조22년) 만년제를 현륭원 입구에 축조하고, 1799년(정조23년)에는 지금의 서호인 축만제와 서둔을 완성했다. 이로써 화성은 더욱 안정된 재정기반을 갖춘 자급자족 도시로 성장해 갔다.
--- pp.243-244「제6장. 정조의 죽음과 위대한 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