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경, 다크시네스와르에 비슈누파의 한 방랑 수행자가 찾아왔다... 그는 항상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신상을 지니고 다녔는데, 그것을 람랄라(Ramlala 소년 라마)라는 사랑스런 이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이 작은 신상을 향해, 자신의 신성한 아들 라마를 향한 코살리야(Kusalya 라마의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나타내 보였다.
일생동안 영적 수행을 계속해 온 결과, 그는 실제로 그 금속 신상에 신의 현존을 구현해 왔다. 그에게 있어서 람랄라는 더이상 쇠붙이 형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이었다. 그는 라마를 보살피고, 먹이고, 놀아주고, 함께 산책하고, 씻기는 데 헌신했다. 그는 신상이 자신의 사랑에 감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은 라마크리슈나는 자타다리에게 다크시네 스와르에서 얼마간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 곧 람랄라는 라마크리슈나에게도 친근한 반려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헌신자들에게 그 작은신상이 자기 앞에서 얼마나 우아하게 춤추었는지, 자신의 등에 올라타고, 안아달라고 조르고, 햇살을 받으며 들판을 달리고, 수풀 사이에서 꽃을 꺾고,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짓궂게 놀던 모습을 설명했다. 그와 람랄라 사이에는 애틋한 관계가 싹텄고, 그는 람랄라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을 느꼈다.
어느날 자타다리는 라마크리슈나에게 신상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눈물이 글썽한 채 작별을 고했다. 그는 람랄라가 자신의 가장 깊은 부분의 기도를 이루어주었으며 따라서 자신은 더이상 형식적인 예배를 드릴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며칠 후 라마크리슈나는 람랄라를 통해 라마찬드라가 나타나는 비전을 보는 은총을 입었다. 비전을 통해 그는 서사시 라마야나에 나오는 다샤라타의 아들 라마가 영과 의식으로서 온 우주에 편만해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창조자이며 유지자이자 파괴자라는 것을, 다른 표현을 빌자면, 형태도 속성도 이름도 없는 초월자 브라흐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람랄라를 성스러운 아들로 숭배하는 동안 라마크리슈나의 가슴은 모성의 온화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나 행동도 변하게 되었다. 그는 마투르 일가의 여인들과 자유롭게 교제하기 시작했고, 그녀들 또한 라마크리슈나를 자기네들과 같은 여성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성한 어머니를 여성 동료로 혹은 시녀의 입장에서 그녀를 숭배하게 되었다.
라마크리슈나는 이제 신을 대상화하여 숭배하는 데 있어서 거의 도달하기 어려운 높이에 오르고자 헌신했다. 즉, 사랑하는 연인 스리 크리슈나와의 완전한 합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브린다반의 고피들(목장 처녀들. 크리슈나의 동료이자 헌신자) 중 하나로 여겼고, 자신의 거룩한 임에 대한 갈망으로 타들어갔다. 그는 마투르에게 요청하여 여자들이 입는 옷과 보석을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연모의 과정에서 라마크리슈나는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잊었다.
밤낮으로 그는 스리 크리슈나의 비전 때문에 심하게 흐느꼈고 그 그리움은 격렬한 광증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신성한 크리슈나가 에전에 고피들과 함게 하던 장난을 그와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적거리고 놀려대고 이따금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도 했으나 언제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라마크리슈나의 고뇌는 다시 예전의 신체적 증상을 가져왔다. 온 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모공마다 핏방울이 스며 나왔으며, 관절이 헐거워지고, 생리적 기능까지 멈추었다.
바이쉬나바 경전은 스리 크리슈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라다(브린다반의 목장 여인 가운데 크리슈나 신의 절친한 동반자)의 비위를 맞추고 그녀의 은총을 입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그래서 고뇌하던 헌신자는 이제 라다에게 기도를 올리게 되었다. 짧은 시간 내에 그는 라다의 비전을 보는 축복을 누렸다. 그는 자신의 몸 속으로 사라져 들어오는 라다의 모습을 보고 느꼈다.
후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라다의 천상적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녀의 모습은, 크리슈나를 향한 정열적인 사랑 안에서 자신을 완전히 잊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피부는 황금빛으로 찬란했다."
이제 라다와 하나가 된 그는 위대한 몰아의 사랑, 라다에게서 가장 충만하게 표출되었던 마하바바를 구현했다. 나중에 라마크리슈나는 "한 인간 안에 구현되는 신에 대한 열아홉 가지의 정서는 바크티 경전에 마하바바라고 명명되어 있다. 보통의 인간은 이 중에 단 한 가지만 표출되는 데도 일생 전체가 걸린다. 그러나 이 몸(자신을 가리킴)에는 열아홉 가지 모두가 완벽하게 드러났다"고 말했다.
--- pp 51~55
"자신이 행위자라는 자만심을 버린, 진정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매우 유익하다. 이렇게 이기적인 동기 없이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세속에 사로잡힌 사람,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 자유를 얻은 사람, 그리고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다.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즉 사람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세속에 붙잡힌 사람은 세상적인 것에 빠져 신을 망각한 자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자이다."
"지식은 인간이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아는 것에 의해 한정된다. 한정된 것은 무가치하며 결코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대상을 본 것도 아니요, 대상을 들은 것도 아니요, 대상을 안 것도 아닌, 이원성을 넘어선 참 지식은 무한하며 위대하다. 그런 참 지식을 통해서 인간은 무한한 지복을 얻는다. 영원한 주체로서 모든 것의 중심에서 빛나는 그것을 어찌 마음과 감각으로 붙잡을 수 있겠는가?"
--- 출판사 발췌
"자신이 행위자라는 자만심을 버린, 진정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행위는 매우 유익하다. 이렇게 이기적인 동기 없이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세속에 사로잡힌 사람,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 자유를 얻은 사람, 그리고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이다. 언제나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즉 사람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세속에 붙잡힌 사람은 세상적인 것에 빠져 신을 망각한 자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자이다."
"지식은 인간이 대상을 보거나 듣거나 아는 것에 의해 한정된다. 한정된 것은 무가치하며 결코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없다. 그러나 대상을 본 것도 아니요, 대상을 들은 것도 아니요, 대상을 안 것도 아닌, 이원성을 넘어선 참 지식은 무한하며 위대하다. 그런 참 지식을 통해서 인간은 무한한 지복을 얻는다. 영원한 주체로서 모든 것의 중심에서 빛나는 그것을 어찌 마음과 감각으로 붙잡을 수 있겠는가?"
--- 출판사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