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나는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엄마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다양한 남자들을 만난 사람이더라. 네 명의 친오빠, 친척들, 대학 동창생들을 비롯해, 30여 년이 넘는 기자 생활, 방송과 강의활동을 하며 장르별 남성들을 거의 다 만나본 것 같다. 젠틀함의 극치로 보였던 명사가 알고 보니 폭력남편이라거나, 지성의 표상인 사람이 술만 취하면 육두문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거나, 소심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뜻밖에 책임감이 강하고, 겉으론 지극한 아내 사랑을 과시하는 남잔데 바람둥이이고, 무뚝뚝하기만 하던 남자가 애인에게 장기 기증까지 해준 사례 등등을 너무 많이 목격했다.
주변의 많은 남성들, 전문가들을 만나서 사랑을 하려는 딸에게 해줄 말을 물었더니, 그들은 한결 같이 이런 대답을 하더구나. “완벽한 남자는 없지만 절대 안 되는 ‘놈’은 있다. 그런 남자를 알아보는 혜안이 중요하다.”
물론 나도 우아하고 부드럽게 “사랑은 완벽한 상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상대를 완벽하게 바꾸어 가는 것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 등의 아름다운 말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56년의 삶을 살며 직간접적으로 ‘사랑’을 많이 체험한 나는 막연하고 무책임한 말, 달콤하고 희망적인 이야기만 할 수는 없다. 어머니나 인생의 선배라면 “화려해 보이지만 이건 독버섯이다”라고 독버섯을 분별하는 요령도 알려줘야 하고(멋진 모습으로 독을 감춘 독버섯보다 더 독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다녀와 보니 저 쪽에 지뢰가 숨겨져 있고(언제 터질지 모르는 분노조절장애자는 지뢰보다 무섭다), 과식이나 과욕보다 소식과 소박함이 건강에 좋고(지나친 집착, 시도 때도 없는 자기자랑, 끝없는 변명과 핑계는 일종의 성격장애다), 아무리 훌륭한 꽃밭도 물을 주지 않으면 황폐해지고(노력과 성의 없이 사랑은 자라지 않는다) 등등을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 p.12~13
엄마도 언제나 사랑이 두려웠단다. 마치 물이 무서워 안전한 수영장에서조차 못 뛰어드는 아이처럼 말이다. 남들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살을 가르는 느낌도 즐기고 위험하긴 해도 바닷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해초들이며 형형색색 여러 빛깔 물고기들과 눈을 마주치는 경이로움도 체험하는데, 나는 물에 발을 담그는 것조차 두려울 때가 있었다.
21세기 알파걸이 아닌 20세기의 고지식한 여성답게 나는 연애할 남자와 결혼할 남자를 분리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조건 남자를 만나면 연인이 아니라 남편감의 기준으로만 판단했다. 그런데 그 무렵 내 또래 젊은 남자들이 무슨 남편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겠니. 20대 남자들은 마음속에는 치기 어린 소년,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는 괴상한 청춘이 복합되어 있는데 말이다. 요즘 말하는 스펙도 못 갖춘 대부분의 남자들이 너무 유치하고 장래성도 없어 보였다.
신랑감을 찾다보니 나 역시 남자들에게 ‘신붓감’으로 보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20세기에 걸맞게 다도도 배웠고 손수건에 이니셜을 십자수로 놓아주는 정도의 음전함과 조신함을 강조하려 했다. 정말 어이없는 착각이었지. 그러다 보니 혹시나 상대 남자에게 좋은 신붓감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어느 정도 호감을 느껴 몇 번 만났는데 그 사람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려 하면 덜컥 겁도 나고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손을 잡으려 해도, 추운 날 허리에 살짝 손을 두르려 해도(그때는 남자가 허리를 만져도 민망할 옆구리살도 없었는데) ‘나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것이 아닌가’란 생각에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너무 거리를 두고 마냥 점잖기만 한 교회오빠 같은 남자를 만나면 ‘내가 그렇게 여성적인 매력이 없나’ ‘눈곱만큼의 섹시함도 못 느끼나’ ‘혹시 저 남자는 성적 욕망이 없는 체질인가’ 등의 자괴감과 위구심을 가졌다. 경계선 정신병도 아닌데 3미터 밖에 있으면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 두렵고, 1미터 안으로 들어오려 하면 내 생활이 침범 당하거나 내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아 두렵고....이게 무슨 모순인지.
--- p.23~26
어릴 때 네게 “엄마는 너를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제일 사랑해”라고 하면 넌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도 그래. 엄마”라고 말했지. 그 말에 너무 뿌듯해져서 “정말?”이라고 물으면 넌 “응, 나도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라고 답하며 까르르 웃었단다.
딸아. 부디 네가 한 이 말을 잊지 말아라. 엄마는 진심으로 네가 네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게 네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하고 네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그 어떤 효도보다도 값지고 그 어떤 연애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네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도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리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회의가 들고 고통이 동반되는 것은 네 자신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이다. 네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자존감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그 사람이 네 마음 같지 않다고 해서 쉽게 상처받지 않을 게다. 그리고 그렇게 네 자신을 아끼는 너의 모습을 보며 그 사람도 너를 존중해주려 할 것이다. 혹은 비열하고 사악한 남자를 잠시 만났더라도. 혹은 부적절한 관계에 빠졌더라도 주위의 이목이 아니라 네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훌훌 털고 극복할 수 있다.
--- p.3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