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세기에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우리는 이미 환상에 불과한 황금기가 사라지는 것을 두 차례나 목격했다.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에 냉전이 끝난 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안보라는 은혜를 베풀면서 황금기를 구가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이런 기분 좋은 가정은 2001년에 산산이 깨졌다. 무장세력이 9월 11일에 미국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하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 공격에 나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이 광범위하고 공격적이며 궁극적으로는 자멸적인 ‘테러와의 전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경제 성장과 번영은 대체로 믿을 만해 보였다. 언제나처럼 승자와 패자가 있었지만, 부유한 나라들의 국민 대부분은 살기가 제법 괜찮았고, 가난한 나라들의 국민도 대체로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속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부채와 신용 체계에 토대를 두었던 그 세계는 2007년과 2008년의 충격적인 신용경색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의 신용경색은 네다섯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여파가 가시지 않은 경기침체와 재정 파탄을 초래했다. 황금빛 환상이 깨지자 중대한 쟁점들--부와 빈곤, 전쟁과 평화, 권리와 존중, 인류와 지구의 건강--에 대담하게 대처할 방법을 찾기 어려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1 우리는 누구인가」
부의 심각한 불평등은 이 세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세계 인구 중에서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심한 빈곤층의 비율이 낮아지고는 있지만 그 속도는 느리다. 더욱이 인류의 3분의 1 이상이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21세기 초입에 세계의 지도자들은 개발도상국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 새롭고도 중요한 노력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자신감에 차서 기금을 추가로 투입하고 2015년까지 목표를 달성하기로 못을 박았다. 그 후부터 서구 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이 새천년개발목표를 이끌고 지원해오고 있다. 여전히 2008년 사태의 경제적 여파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원조국들의 노력이 지난 10여 년간 성과를 거둔 것은 분명하지만, 2015년까지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는 실패할 것으로 보인다.
새천년개발목표는 대체로 전통적인 세계열강의 활동이다. 떠오르는 열강인 중국과 인도가 어떤 식으로든 이 계획에 동참할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1990년부터 중국의 경제실적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통적인 자본주의 세계의 경제실적을 극적으로 앞질러왔으며, 2008년부터는 압도적으로 앞질러왔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중국의 세계시장이 줄어들면서 중국 경제도 타격을 받고 있다. 이런 변화의 정치적 결과가 어떠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2 부와 빈곤」
이 세상이 평화로운 장소는 아닐지라도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는 지금이 가장 평화로운 시대이며,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라고 주장하는 이들마저 있다. 여전히 무력분쟁이 사망의 주요 원인이지만, 이전 시대들과 비교해 전쟁이 확연히 적게 발발하고 덜 치명적이다. 냉전이 종결된 뒤 20년 동안 평화협정이 연이어 체결되었으며, 단순히 강화를 맺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들에서 장기적인 평화의 토대를 놓기 위한, 조용하지만 꾸준한 노력이 뒤따랐다. 물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많은 나라들의 경우, 실상은 평화를 달성한 것이 아니라 분쟁을 억누른 쪽에 더 가깝다. 요즈음 벨파스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가 한 예다. 그렇지만 많은 나라들이 내전과는 양상이 전혀 다른 폭력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갈등은 범죄와 정치의 위험한 교류에서 비롯되고 그런 교류를 강화한다. 몇몇 나라에서는 불법 마약거래나 이윤이 막대한 불법 사업을 중심으로 폭력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무력분쟁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가 의존하는 주요한 국제기구들은 이런 류의 폭력적 갈등에는 놀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국제연합은 고위급 대표를 파견해 가장 가증스러운 독재자와도 교섭을 진행할 수 있지만, 같은 지역의 정부와 마약왕 사이에는 국제연합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많은 나라들이 내전과는 양상이 전혀 다른 폭력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런 갈등은 범죄와 정치의 위험한 교류에서 비롯되고 그런 교류를 강화한다. 몇몇 나라에서는 불법 마약거래를 중심으로 폭력적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내전이 더 많이 발발할 위험도 아직 남아 있다. 그런 위험 지역은 환경적 ? 인구학적 ? 경제적 압력을 받고 있다. 평화활동을 지원해오던 정부들 중 일부는 2008년 경제위기로 심대한 타격을 받은 탓에 장기적인 평화구축계획을 지원하기에는 경제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고 결론내릴지도 모른다. 이 모든 위험이 잠재하고 있지만 국제연합과 정부들이 목표에 집중한다면, 평화구축계획이 계속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3 전쟁과 평화」
2008년에는 민주주의가 확립된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세계 인구의 43퍼센트였고, 2012년에는 48퍼센트였다. 이런 식의 통치는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다. 역사가 이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기껏해야 한두 세기 전부터이며, 20~25년 전만 해도 민주주의 정부가 전 세계의 표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평화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보호해야 할 흐름이다. 슬프게도 민주주의가 굳게 뿌리를 내리고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투쟁했던 시절이 잊히고 나면, 민주주의에서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곤 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의 깊이를 확인하기에 좋은 리트머스시험지는 인권에 대한 존중 여부다. 인권을 지탱하는 국제협약과 국제법의 망은 갈수록 튼튼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인권 유린 실태가 전보다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면 권리에 따르는 책임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가장 원활하게 기능하는 공동체에는 권리와 책임에 대한 균형 잡힌 의식이 있다.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란 구성원들이 자신의 권리만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의무까지도 명확하게 의식하는 사회다.--- 「4 권리와 존중」
건강하지 못하다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자신과 서로의 건강을 돌보는 것은 기본적인 일이다. 건강은 정치적 선택의 문제이자 개인적 책임의 문제이며, 정부 정책의 문제이자 개개인의 행동 문제다.
넓게 보아 인류의 건강은 나아지고 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와 예방이 가능한 질환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또한 많은 나라들에서 심리장애를 대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의학이 발달하고 있고, 인간 게놈의 염기서열이 해독되고 있으며, 각종 암의 유전적 특징이 드러나고 있고,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고 앞으로도 개발될 것이다.
과학의 진보만으로는 불충분할 것이다. 오늘날 발병률이 증가하는 주요 질환들에는 사회적인 원인이 있다. 빈곤하거나 부유한 생활방식이 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런 질병들 대다수의 치료에서 관건은 교육, 행동 변화, 사회적 진보를 통한 예방이다.--- 「5 인류의 건강」
오늘날 자연환경에서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경각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을 형성한 다른 사건들과 비교할 때 자연환경은 느리게 변하고 있다. 자연계의 시간척도는 정치의 주기이자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최대 기간인 4~5년보다 훨씬 길다. 21세기 정치문화의 기준으로 보면, 그런 변화는 전혀 위기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전환점--어떤 지구한계선--에 접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계산해보더라도 2030년 이전에 세계 인구의 과반수가 물부족 사태를 직면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00년간 세계의 경제산출량이 급증하면서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기체가 대기 중으로 대량 배출되었다. 물리학의 법칙에 따르면 배출된 온실기체는 전 세계의 평균 기온을 올릴 것이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폐기물을 만들어내고는 아무렇게나 버려왔으며, 몇몇 지역들을 찾아가면 그 결과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다.
--- 「6 지구의 건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