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세계에서 곡물은 신이 내린 선물이다. 여성은 농경사회에서 곡물을 지키는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를 살펴보면, 여신이 등장해 밀을 비롯한 오곡을 만들어낸다. 그리스 신화의 곡물 여신인 데메테르Demeter는 농업을 관장하는 대지의 신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명부冥府의 왕 하데스가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자, 대지가 황폐해지고 곡물이 메말랐다. 제우스신이 중재에 나서 딸을 되찾으면서 대지는 다시 결실을 맺었다고 한다. ‘데de’는 대지와 곡물, ‘메테르meter’는 어머니인 모성을 상징한다. 이 여신은 밀 이삭 다발과 낫을 든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집트 신화의 이시스Isis는 풍요와 다산을 베푸는 곡물 여신으로, 머리에 밀을 이고 있다. 밀을 발견한 여신으로 일컬어진다. 로마 신화의 케레스Ceres는 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에 해당한다. 오곡의 여신으로서 밀과 개양귀비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다. 곡물을 뜻하는 영어의 시리얼cereal이란 말은 케레스에서 유래한다.(18~19쪽)
기원전 5000년에 중앙아시아 고원에서 번성하던 야생종 밀로부터 자카프카지에 지역에서 빵밀이 탄생한다. 기원전 3000년에 중국에서 밀 재배가 시작되고, 기원전 2000년에 맷돌이 고안되어 밀가루 채취가 가능해진다. 기원전 1000년에는 메소포타미아 유역에서 마카로니밀이 출현한다. 한편 서남아시아에서 소아시아로 전해진 빵밀은 기원전 5000~4000년에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유역에 도달하고, 기원전 3000년경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다. 한참 뒤지만 미국과 캐나다에는 17세기에, 오스트레일리아에는 18세기에 이민과 함께 전해진다. 그리고 밀 재배에 더없이 적합한 이들 광대한 지역은 세계의 밀 주산지가 된다. 빵밀은 쌀쌀하고 건조한 기후 풍토를 좋아하는데, 적응성이 커서 러시아ㆍ미국ㆍ캐나다ㆍ중국ㆍ인도ㆍ프랑스ㆍ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된다. 아시아 집중형인 쌀 재배지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빵밀은 지구상의 어딘가에서 일년 내내 수확된다. 수확 시기는 오스트레일리아ㆍ아르헨티나ㆍ칠레(1월), 멕시코ㆍ쿠바(4월), 중국ㆍ일본(5~6월), 프랑스ㆍ영국(7월), 독일ㆍ네덜란드(8월), 스웨덴ㆍ노르웨이(9월), 러시아ㆍ핀란드(10월)이다. 미국ㆍ캐나다ㆍ러시아가 세계 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한다.(24~25쪽)
보리는 비타민 B군이 풍부해, 쌀과 섞어 밥을 지으면 각기병을 예방한다. 간장이나 된장 원료로도 빼놓을 수 없다. 보리를 발아시킨 맥아는 맥주나 위스키의 양조 원료, 물엿을 만드는 당화제로 쓰인다. 보리는 밀에 비해 탈곡과 정백이 쉬우므로 입식에 적합하다. 그런데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도 밀 같은 글루텐 형성 능력이 없다. 이처럼 조리의 폭이 한정적이어서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먹지 않게 되었다.(32쪽)
제분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에는 곡류의 이용이 입식으로 제한되었다. 볶아서 미숫가루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죽(알곡째 쑨 죽ㆍ거칠게 빻아 쑨 죽ㆍ가루를 내어 쑨 죽) 단계에서는 밀보다 보리의 이용가치가 높았다. 『요리의 기원』에 따르면, “농사짓는 일만 놓고 본다면, 보리가 밀보다 재배나 수확이 용이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리는 밀보다 빨리 여물고, 낟알이 굵고, 수확 안정성도 높다. 고대 농업에서 보리가 주요 작물이었던 것은 당연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제분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보리보다 밀 이용이 쉬워진다. 밀은 글루텐 형성 능력이 있어서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그로 인해 맥류의 조리 형태는 보리에서 밀로, 입식에서 분식으로 크게 변모한다.(32~33쪽)
『목면 이전의 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절구를 써서 곡식을 빻는 일은 지금 생각하면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시토기(공물로 올리는, 길쭉한 달걀 모양의 떡)같이 쌀을 불려 빻아서 만드는 음식은 괜찮다. 콩가루나 미숫가루처럼 불기운을 쐰 것도 잘 빻아진다. 메밀처럼 잘 으깨어지는 곡물은 그나마 낫다. 맷돌이 없던 시절에는 생쌀이나 생밀을 빻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니 특별한 날에나 맛보는 귀한 음식을 장만하려면, 여성들은 시간과 수고를 꽤나 들여야 했다. 세월이 흘러 맷돌을 싣고 마을을 돌며 곡식을 빻아주는 상인이 출현해 환영받으면서, 절굿공이가 한낱 달나라 토끼나 드는 물건이 되고 만 사정 또한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도 간토 지방에서는 곡분 수요를 대지 못해서 제분업자가 생겨나고, 방앗간집 딸은 마을마다 전하는 풍년만작의 노랫가락이나 방아타령에 인망 있는 제재로 등장한다.”(48~49쪽)
쌀은 입식, 밀은 분식을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에 가장 잘 맞는다. 왜 그럴까. 쌀과 밀은 조리 특성상 어떤 차이가 있을까. 쌀 낟알은 탈곡해서 겉겨를 분리하고, 현미 상태에서 속겨만 제거하면 먹을 수 있다. 이 공정을 도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림 10](34쪽)에서 보듯이 밀 낟알은 ① 여섯 겹이나 되는 강인한 겉껍질이 싸고 있고 ② 배젖 부분이 무르고 ③ 한가운데 깊은 골이 패어 있다. 따라서 쌀과 달리 겉껍질을 간단히 제거할 수 없다. 이런 구조상의 차이로 인해 쌀과 밀의 조리 특성은 크게 달라진다. 『조리 요령의 과학』에 따르면, “조리의 관점에서 식품 특성을 살펴보면, 영양 성분이 유사한 식품 간에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서로 다른 조리 특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쌀과 밀은 모두 전분질 식품이고, 식품성분표만 본다면 수치상의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구조상의 차이인 겉껍질과 배젖의 무르기가 달라서, 입식과 분식이라는 상반된 이용 형태로 갈린다”라고 한다.
볶거나 죽을 쑤어 입식하던 시절에, 인류는 밀이 지닌 자연계의 조리 특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밀에서 채취한 밀가루에 물을 넣고 개면, 수분을 흡수한 단백질이 부풀면서 반죽 속에서 결합해 점탄성을 띤 덩이를 형성한다. 이 글루텐 결합 상태에 변화를 주면, 빵ㆍ국수ㆍ과자 같은 다양한 음식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밀가루는 단순한 전분원이 아닌, 화려하게 변신하는 신비로운 소재다.(36~37쪽)
인류는 오랫동안 한 번의 조작으로 이루어지는 즉각 제분(sudden death)을 계속해왔다. 그리고 17세기에는 프랑스에서 다단식 제분방식(gradual milling system)이 개발된다. 여기에 헝가리ㆍ오스트리아ㆍ스위스ㆍ독일ㆍ영국ㆍ미국의 우수한 기술이 더해지면서, 각지에 대규모 수차 제분공장이 출현한다. 다단식 제분방식이란 질 좋은 밀가루를 채취하기 위해 낟알을 감싼 밀기울(껍질 부분)을 시간을 들여 세심하게 제거하는 조작이다. 밀을 단계적으로 조금씩 타서 그때마다 체가름을 한다. 현대 제분공정에 적용해보면 파쇄(breaking)→분별(grading)→순화(purification)→분쇄(reduction) 공정을 반복하면서, 체가름(shifting)을 거쳐 분별ㆍ채집한 밀가루를 섞어 질 좋은 밀가루를 얻는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에서 증기기관을 이용한 대규모 제분공장이 실현된다. 그리고 맷돌 원리를 응용한 롤 제분기(파쇄 롤ㆍ분쇄 롤)도 고안된다. 미국의 엘리베이터와 컨베이어를 도입하면서 양산화가 촉진되고, 순화기(purifier)란 획기적인 장치가 발명되면서 기울을 효율적으로 분리하게 된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수랭식水冷式 칠드 롤chilled roll을 채용해, 과열로 인한 품질 저하를 막는다. 제분 공업은 전 세계의 지혜와 노력의 결집체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제분 장치는 빠르게 근대화한다.(60~62쪽)
빵의 발생을 찾아 거슬러 오르면 6천 년의 장대한 드라마가 펼쳐진다. 빵은 인류가 이룩한 식문화의 원점이다.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빵의 역사는 미음→죽→납작한 빵→빵(무발효빵, 발효빵)과 같이 입식에서 분식으로, 젖은 음식에서 마른 음식으로 변천해간다. 보리나 밀을 빻은 맥분은 그 상태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물을 넣고 반죽해 얇게 빚어서 달군 돌에 붙여 구우면 납작한 빵이 된다.(93~94쪽)
오늘날 싸고 맛있고 먹기 간편한 국수음식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근세 이후 화교의 진출로 인해 동남아시아 각국에도 국수음식이 침투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쌀가루를 원료로 한 국수도 많다. 이탈리아에서 출현한 파스타는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사랑받고 있다. 중국의 전통 국수기술을 계승한 인스턴트라면이 일본에서 개발되면서, 국수는 세계적으로 급속히 보급된다.(177쪽)
20세기 중반에 파리의 고고학자인 앙드레 파로 교수에 의해 유프라테스 강 근처의 마리 궁전(기원전 3000년대) 부엌 터에서 과자 틀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과자의 원류는 인류 역사와 함께 고대 이집트ㆍ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오르며, 중세ㆍ근세ㆍ근대로 이어 내려오고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딱딱한 무발효빵인 갈레트galette가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는 주현절을 축하하는 과자로 갈레트를 만든다. 그리고 벌꿀과 과일을 넣은, 밀가루 과자다운 모양을 갖추어간다.(269쪽)
21세기 세상에서는 과자의 양극화 동향이 심화될 것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① 전통 과자와 양산 과자 ② 고급화와 간편화 ③ 조형造型과 실질 등이다. 이 같은 양극화는 서로 맞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적절히 역할 분담을 한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앞으로의 과자는 ① 더 산뜻하고 ② 더 소프트하고 ③ 칼슘 같은 영양성분을 강화하고 ④ 당도ㆍ지방ㆍ조미료 함량을 낮추고 식이섬유 함량을 높인 ⑤ 건강 지향 ⑥ 오리지널 지향으로 가닥을 잡아갈 것이다.(305쪽)
에도에 막부가 들어서고, 1616년에 에도 니혼바시日本橋에 어시장이 열린다. 이로써 뎀뿌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신선한 생선과 조개를 구할 수 있게 되면서, 노점에서 서서 먹는 뎀뿌라가 에도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반죽도 달라진다. 재료의 참맛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반죽에 별스런 조미를 하지 않게 된 것이다. ① 재료의 참맛 ② 얇고 아삭한 튀김옷의 느낌 ③ 기름의 풍미, 서로 다른 이 세 요소들이 빚어내는 맛의 조화를 즐기는 일본 특유의 뎀뿌라가 완성된다.(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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