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야, 이제라도 미국을 포기하면 안 되겠니? 윤희 없이 어떻게 살라고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제발 가지 말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상우야, 내가 멀리 떠나야 해. 너도 가정이 있고 딸도 있으니 너는 너의 가정을 지키고, 나는 나대로 내가 낳은 아이들에게 책임 있는 엄마가 되어 주려는 거야. 똑똑하고 예쁜 내 아들과 딸이 그늘 없이 자라도록 내가 힘을 다해서 키워 주려면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운명이야.” --- p.12
“김윤희, 내 이름은 서상우다. 이제부터는 상우라고 불러라.” 내 짝 남학생이 말했다.
“윤희, 너 참 이쁘게 생겼네.”
말해놓고도 쑥스러운지 싱긋 웃으면서 어서 밥을 먹자고 했다. 망설이던 나는 배가 고파서 못이기는 척 밥술을 떴다. 내게 덜어 준 밥이 너무 많아서 내 짝에게 다시 덜어 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든 반찬은 맛도 정말 좋았다. 상우는 집에서 참 잘해 주는구나. 식구가 많아 내게 별다른 신경을 써 줄 틈이 없는 우리집 풍경이 머리를 스쳤다. --- p.19
여기가 우리집이야. 우리집 앞에 왔을 때 나는 상우에게 말했다.
“야아, 김윤희 너희 집 참 좋구나!”
제주도에서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은 말 그대로 구십구 칸 기와집이었다. 나지막한 돌담 안쪽으로 한여름 내내 노랑장미가 덩굴을 뻗어가며 많은 꽃송이를 피을 때면 보기만 해도 어린 가슴이 뛰었다. 그밖에 청포도나무 등 여러 가지 귀한 나무들과 화초들이 보기좋게 가꾸어져 있고, 뒷뜰에는 감나무, 밀감나무가 무성한 밭을 이루고 제철마다 많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았다. 우리집 어디에도 피난민이 사는 티는 나지 않았다. --- p.21
코피를 멎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나는 재빨리 블라우스를 벗어서 상우 코피를 닦아 주었다. 마침 속에 런닝셔츠를 입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흰색 블라우스는 오늘 처음으로 입은 새 옷이다. 오늘 아침 상우가 윤희 오늘 참 예쁜 옷을 입었구나 하면서 아주 좋아했었다. 나는 피가 묻지 않은 부분을 이로 물어뜯어 찢어서 상우 코에 꼭꼭 밀어 넣어 주었다. 피에 젖으면 빼내고 다시 옷을 찢어 밀어 넣으며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 p.25
“윤희, 우리 결혼하자.”
생각지도 못한 말인데도 그렇게 놀랍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윤희 너는 갑자기인지 몰라도 나는 어릴 때부터 너를 좋아했고 사랑했어.”
상우 얼굴에서 간절함이 묻어난다. 지금도 너를 사랑해.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와서 무작정 결혼하자고 하면 어떡해. 그 동안 무얼 하고?”
--- p.28
“오늘 숙직이라 회사에 가봐야 해.”
결혼하고 한 20일쯤 지난 어느 날, 집을 나서는 남편에게서 뭔가 분명치 않은 어색함이 느껴졌을 때, 나는 평생 같이 살 사람인데 서로가 믿고 살아야지 하며 께름직한 느낌을 털어냈다. 그 후로는 숙직도 자주 돌아오고, 퇴근 시간도 점점 늦어졌다. 나의 믿음은 자신을 잃어가고, 회사로 전화를 해 볼까 하는 의구심과 싸우느라 안 그래도 심한 입덧으로 지쳐가는 몸에 힘이 빠졌다. 제대로 먹지도 못해 쓰러질 것 같은 아내는 안중에도 없는지 남편은 회사 핑계로 밤샘하는 날이 많아졌다.--- p.40
의학박사 서상우.
그에 대한 기사는 화려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고, 또 전문의 자격도 3개나 합격하고 돌아와서 지금 자기 모교인 S병원에서 내과 1과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알려 주고 있었다. 서상우 박사의 능력으로 보아 앞으로 우리나라 의학 발전을 위해 아주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도 실려 있었다.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상우가 분명했다. --- p.71
몸이 좋아지면서 내 마음도 그만큼의 평화를 얻었다. 마음이 편해지니까 당장 이혼하겠다던 결심은 어느 틈에 내 아들딸을 미국에서 공부시켜야겠다는 결심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내가 지금껏 버틴 것도 아이들만은 최고로 키우겠다는 고집 때문이 아니던가. --- p.101
“김윤희씨 계시면 잠깐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세요. 제가 윤희인데요.”
“야~ 임마, 무정한 사람. 나야 나 상우!”
잠깐 모든 것이 정지된다. 그럴 리가 없지. 여긴 뉴욕이 아닌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상우라니, 초등학교 동창? 하고 간신히 묻는다.
“그럼 나 말고 상우가 또 있냐?”
나는 순간 쓰러지듯 주저앉는다. 핑그르르, 어지럽다. 센 주먹으로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다. 꿈인가? 기적 같은 일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집 전화번호는 어떻게? 지금 어디서 전화를 하는 거야?”--- p.174
꽃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온통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으로 갔다.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되어 있다는 이 집은 작은 박물관 같이 웅장한 모습이다. 실제로 1층에는 많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다른 곳은 아직 비어 있다고 한다.
집 앞에 ‘상우와 윤희를 기념하는 집’이라고 새겨져 있는 대리석 표석이 주인을 반기듯이 반들거리고 있다. 내게 꼭 보여줄 것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이 집인가?
--- p.219
놀랍게도 말로만 듣던 금그릇에 밥과 국이 담겨 있다. 생전 처음 실제로 보는 금그릇이다.
이 금그릇은 약 70년 전에 상우할아버지께 한 친구가 선물한 것으로, 아직까지 그 누구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포장되어 있던 것을 어제서야 처음으로 풀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상우 부모님도 포장조차 풀어보지 않고 귀하게 간수해 온 금그릇이지만, 윤희 밥만은 그 금그릇에 담아 주고 싶었다고 한다. 금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먹기는 그도 당연히 처음이다. --- p.229
다음 날 아침 11시. 미국대통령 부부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아프리카 전통옷을 입었다. 나는 대통령과 악수만 나누고 접견실에는 그만 들어갔다. 내가 통역을 통해 영부인과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상우와 대통령이 나와서 다시 인사를 나눈다.
“어떻게 저렇게 훌륭한 남자하고 결혼을 할 수 있었는가?”
대통령은 자기 부인이 하는 말을 듣고는 우리를 향해 윙크를 보내더니 자기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어깨를 으쓱한다. --- p.255
오랜 세월 우울증으로 고생한 나를 위해 상우는 영국에서 세계 제일이라는 유명한 정신과 의사 두 명과 또 다른 영국인 정신과 의사가 홍콩에서 건너 와 윤희의 건강을 검진해 주었다. 진찰 결과 세 명의 의사가 모두 아주 좋아졌다고 하자 그는 아주 만족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