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언매치」
달리는 키스 캠벨 복제사의 대리점 직원이자 그 회사를 통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된 복제인간이다. 달리의 부모는 많은 나이에 어렵게 하나 얻은 귀한 아들이 미국 유학 중에 갱들의 총에 맞아 죽자, 전 재산을 털어 죽은 아들의 유전자로 달리를 태어나게 했다. 그러나 달리는 죽은 형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달랐다. 형은 수학에 천재였던 반면 달리는 수학공식 외우는 것 보다는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이런 달리에 대한 부모의 불만은 점점 커져가고 그것은 죽은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형의 복제인간이지만 결코 형이 될 수 없었던 달리가 기댈 곳은 여자친구인 유리뿐이다. 그녀는 죽은 강아지를 은행나무로 복제시켜달라고 대리점을 찾아왔다가 처음 달리와 만났다. 갓난아이 때 버려져 동성연애자의 집에 입양된 유리는 환각 증세를 보이는 유전병으로 인해, 종종 자신이 빠져 지내는 컴퓨터 게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곤 한다. 선택된 생명과 버려진 생명의 삶을 깊이 있게 다룬 소설.
「욕망의 수수께끼,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초창기 키스 캠벨 복제사의 인간복제에 난자를 제공했던 임미란은 그 후유증으로 조기폐경이 되어 아이를 갖지 못했다.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 생활은 이혼으로 이어졌고, 입양한 아이마저 사고로 잃자 임미란은 죄책감에 빠져 정신까지 이상해지기 이른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 그녀에게 달리가 찾아온다. 자신을 인권위원회에서 나왔다고 속인 달리는 그녀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자신과의 공통점을 찾다가 그녀의 지난 세월에 마음 아파한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기 전, 인간복제 반대 시위대 속에서 만났던 자신의 대리모 김박민주씨를 떠올리며, 그 둘의 불행이 마치 자신 때문인 것 같아 괴로워한다.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한 복제인간의 모습과 인간복제 이면에 숨겨진 상처받은 자들이 이야기.
「슬픈 아열대」
유리의 환각 증세가 더욱 심해질 무렵, 유리의 엄마와 이모 사이에 커다란 문제가 생긴다. 유리를 입양해 키워왔던 엄마와 이모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그런데 유리의 엄마에게 다른 이성의 애인이 생긴 것이다.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이모를 위로해주던 유리는 이모의 품에서 자신이 위로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에서 돌아온 엄마가 임신을 했다고 털어놓으며 둘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결국 이모가 엄마의 옆구리를 칼로 찌르는 사태가 발생, 엄마, 이모와 함께 병원으로 향한 유리는 그곳 3D비전을 통해 복제인간이 자신의 노부모를 의식불명 상태로 만드는 패륜 범죄를 저질렀다는 뉴스를 접한다. 화면에 보이는 남자가 자신의 남자친구임을 느꼈는지 유리는 화면에 다가가 손을 뻗다가 그만 발작 증세를 일으킨다.
「소멸의 흔적」
인사동에서 우연히 죽은 아내의 모습을 본 ‘나’는 그녀를 쫓다가 결혼 전 이 년 동안 살았던 옛집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방문을 열고 나오는 지난날 자신의 모습을 본다.
입 구 자 모양으로 된 그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개 한 마리가 있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그 증상이 점점 심해지던 어느 날,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구더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 원인을 찾다가 마당 한 구석에서 도둑고양이가 오래전에 죽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흐르는 작가만의 독특한 시간 흐름을 보여주는 소설.
「용꿈」
놈은 아빠가 버리고 떠난 서재에서 1962년도 발행된 완판본 춘향전을 발견한다. 놈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놈의 아빠는 동생을 데리고 할아버지 집으로 가버렸다. 놈의 엄마는 자신과 놈이 살아남는 길은 놈의 아빠가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라 믿으며 선거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지만, 놈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은 채 모아둔 용돈과 춘향전을 들고 가출한 뒤 PC방에서 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년을 만나, 년이 살고 있는 옥탑방에서 밤마다 춘향전의 사랑가 내용을 따라하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놈의 아빠는 낙선을 하고, 아빠의 낙선과 스타크래프트 게임 장면이 어우러진 용꿈을 꾸다 늦잠을 잔 놈은 옥탑방에 올라온 년의 엄마와 마주친다. 가방도 버려둔 채 몸만 간신히 빠져나온 놈은 그날 저녁에 년의 품을 잊지 못하고 다시 옥탑방으로 찾아가지만, 년은 오히려 놈을 도둑 취급하며 경찰에게 넘긴다.
「K 지하상가 사람들」
어느 날 고백수라는 한 남자가 실종된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 태풍 귀뚜라미가 몰려오는 바람에 K 지하상가에는 물난리가 난다. 내부에 있는 고가의 물건들이 물에 휩쓸려가는 등 아수라장이 된 것이다. 고백수는 자신이 깊은 잠에 들면 홍수가 난다고 얘기하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이 믿기 힘든 이야기는 실제로 겪은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다. 고백수가 실종되기 전날 마지막으로 함께 한 사람은 K 지하상가의 경비원들. 그래서 소설은 이 K 지하상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고백수의 행방에 대한 탐문 수사의 녹취록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엇갈리는 증언들과 K 지하상가의 두 경비원과 사장의 얽힌 관계, 그리고 노숙자인 줄만 알았던 고백수의 가정사까지 예기치 못하게 밝혀진다.
「연」
정여교를 중심으로 각각 체제가 다른 정전과 여전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출입관리소의 허가를 받으면 어디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정전에서 첫사랑의 여인과 이별을 하고 상처를 잊기 위해 여전으로 이주를 결심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예전에 우연히 여행지에서 만났던 신혼부부의 부인을 다시 만나 지난 얘기를 하며 하룻밤을 보낸 뒤, 이주를 포기하고 다시 정전으로 돌아온다. 눈 내리는 서정적인 밤을 배경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인연을 우리나라의 분단 현실과 관련지어 놀라운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주는 소설.
「기둥」
명당을 자랑하는 화자의 집은 오래되어 주저앉아가는 중이다. 마을의 유명한 목수들이 그 집의 기둥을 바로 세우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하지만 그들의 기술로도 할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이라, 할 수 없이 과거에 그 집의 종이었던 김 영감님의 도움을 받게 된다. 기둥을 똑바로 세운 김 영감님은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집은 태풍으로 인해 그동안의 보람도 없이 주저앉고 만다. 그 다음 해, 집은 의병활동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문화재로 복원된다. 하지만 화자는 대체 사람들이 세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쓴웃음을 짓는다. 전통적 가치관과 근대의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충돌과 대립을 ‘소’를 매개로 하여, 역사와 시대에 대한 작가의 깊은 내면의식을 보여주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