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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11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484쪽 | 542g | 140*205*29mm
ISBN13 9791125599944
ISBN10 1125599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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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홍유라
공상을 좋아합니다. 혼자 즐기던 공상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늘 걱정스럽고 부끄러운 기분으로 세상에 이야기를 내놓고 있습니다. 제 이야기가 피로하고 지친 일상 속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휴식처 같은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ttp://blog.naver.com/elles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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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황녀 전하의 40년입니다.”
기가 차다. 아시하는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는 시간의 허망함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황실의 명예, 황실의 긍지 같은 관념보다 황녀 전하께서 살아가실 40년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해!”
그는 적군의 고위 장교고 자신은 자리를 빼앗긴 황녀다. 반역을 일으켜 가족을 몰살시킨 군대의 고위 장교가 이제 와 당신의 삶이 귀중하다 설교를 한다. 그만한 후안무치가 없다. 남은 염치가 있다면 그는 자신이 기온에게 순순히 끌려가도록 두었어야 마땅했다.
“압니다. 제겐 그럴 자격이 없겠지요.”
“그런데도 왜?”
“세상에는 사리 분별을 따져 행동할 수 없는 경우도 간혹 벌어지더군요.”
가장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군인인 그가 이성보다 앞선 감정을 입에 담았다. 가족을 배신하고 아시하를 빼돌린 이 행위에 또 그녀가 모르는 함정이 숨어 있는 게 아니라면 답은 하나뿐이다. 상상할 수도 없고 예상한 적도 없다. 조금도 나눈 적 없다 여겨 믿기지 않았지만 아시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나한테 무슨 마음을 가졌기에?”
대답을 들으면 즉각 비웃어 주려 했다. 내게 어떤 감정을 가졌건 당신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줄 아느냐, 쏘아 주려 했다.
그때였다. 항상 단정하게 지켜오던 그의 표정이 불현듯 흔들렸다. 순간이었으나 그 변화는 분명하고 선명했다. 당혹감, 고뇌, 망설임. 그에게서 볼 수 있으리라 상상하지 못한 일말의 감정들이 파편처럼 반짝였다. 놀라 꽂힌 시선이 그대로 붙잡혔다.
이안이 팔을 낚아챘다.
지켜 왔던 간격이 무너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밀어내려는 아시하의 가느다란 팔까지 한꺼번에 당겨 안았다. 뒷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키고 아시하의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쓸어 삼켰다. 아시하가 팔에 힘을 주어 그 가슴을 떨쳐 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윗입술. 뜨겁게 데워진 숨결이 닿았다. 고개를 비틀며 도망가려 했지만 그는 더 깊게 파고들었다. 아시하는 잡히는 대로 두들기고 쥐어뜯었다. 군복에 달려 있던 훈장들이며 장식들이 후드득 뜯겨 나왔다. 축축하게 젖은 군복을 움켜쥐던 아시하는 그 낯선 촉감에 놀라 저도 모르게 정지했다.
눈에 젖은 게 아니다.
우툴두툴 찢긴 천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익숙해져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냄새가 훅 풍겨 왔다. 더운 땀과 차가운 눈에 희석된 흐린 피 냄새. 그가 집요하게 입술 안쪽을 훑었다. 아시하는 그의 상처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가 혀를 탐하다 거칠게 빨아들였다. 아시하는 상처를 찾아 훑다 헤집어 긁었다. 멎어 있던 피가 손가락 끝을 습하게 적셔 온다.
자신의 긍지를 부수고 언니를 잡으려는 이 남자를 수없이 의심하면서 버텼다. 그 의심을 바탕 삼아 견뎠다. 그의 극점과 나의 극점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아무리 길게 그어도 결코 만나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크게 잘못되었다.
알고 있다. 잘못되었다. 기만이다. 스스로를 상처 입혀 가며 행하는 거짓이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혼란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시야가 아득하다. 스르르 미끄러지려는 손에 힘을 실었다. 땀에, 눈에, 그리고 피에. 의식이 엉겼다. 내 가족을 끔찍하게 죽인 학살자의 아들이다. 같은 혈통을 이은 그의 가족이 한 짓은 그가 한 짓과 다름없다. 그리고 나는,
그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에 의해 다시 상실을 겪었다.
그에 의해 다시 목숨을 건졌다.
그에 의해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또 그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인생이 질기고 모질어 자꾸만 죽음을 피해 가나 했는데 그 막후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죽겠다는 제 각오를 번번이 방해하면서.
이제 한계다. 온몸이 터져 나갈 것 같다. 해일처럼 밀어닥치던 무수한 감각과 번민과 사념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못해 일시에 텅 비워졌다.
의식이 명멸한다. 오롯이 혼자일 수 있는 눈꺼풀 안의 어둠 속에서 나 자신을 놓으려던 순간, 단단해진 눈송이들이 얼굴을 두드렸다. 정신이 퍼뜩 돌아온다. 그는 몸부림을 치는 황녀의 마지막 숨결까지 삼킨 후에야 겨우 아시하를 놓아주었다.
“오늘이 황녀 전하를 뵙는 마지막 날이니 이번 한 번쯤은 저도 솔직해지고 싶습니다.”
듣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 않다. 그를 비웃어 주기는커녕 도리어 내가 후회하게 될 것만 같다. 이 막연한 불안감의 정체를 모르겠다.
“아마도 믿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황녀 전하께 거짓된 말씀은 드린 적 없습니다.”
입술을 깨물었다. 새로운 통증을 빌려서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
“황녀 전하와의 결혼을 진심으로 원했습니다. 그래야만 제 힘으로 전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종속될 수 없는 분이시더군요. 그러시다면 차라리 중립국인 라단으로 망명해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시길 바랐지만 전하께서는 나유타를 떠날 수 있는 분도 아니시지요.”
“그만해.”
“전하께서 무엇 때문에 자신을 계속 희생하려 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전하께서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가 바란 건 오직 그뿐입니다.”
애써 호흡을 추슬렀다. 들썩이는 숨을 억눌렀다.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
“살아가십시오.”
가슴이 쿵, 흔들렸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온 힘을 다하여.
“당신이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해 봤자, 당신이 했던 짓들을 내가 납득할 것 같아? 사실은 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하면 내 마음이 당신을 받아들일 것 같아?”
“저는 황녀 전하의 마음을 감히 바란 적 없습니다.”
그가 확고하게 답했다. 오래 작정해 왔던 것처럼 아주 시원스럽게.
“그러니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이제껏 하셨던 대로 절 원망하고 증오하십시오. 전하께선 그래야 사실 테니까요.”
눈송이가 하염없이 떨어져 내린다. 바람이 불자 얇게 쌓이기 시작한 눈이 베일처럼 희게 몰아쳤다. 어째서 이 겨울에, 하필이면 이리도 눈 내리는 밤에, 그런 침착한 얼굴로, 단단한 목소리로.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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