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침체된 기분을 떨치고 말러의 숨결을 더욱 가깝게 느끼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암스테르담과 빈으로 '말러 성지 순례길'에 나서게 되었다. 암스테르담은 말러가 4회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곳의 높은 문화수준에 깊은 감명을 받기도 한 도시이다. 여기에서 말러 교향곡 7번에 힌트를 제공했다고 하는 렘브란트의 대작 '야경'을 볼 수 있었고 말러와 지인들이 방문했다고 하는 프란츠 할스 박물관도 둘러보았다. 무엇보다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은 암스테르담의 명물인 콘서트헤보우 홀에서 말러의 <대지의 노래>를, 말러가 지휘한 적이 있는 악단인 콘서트헤보우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듣게 된 일이다. 콘서트 홀에서 직접 듣는 <대지의 노래>는 음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황홀함을 안겨다 주었으며, 천상의 세계로 증발하는 듯한 6악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평생 잊지 못할 전율의 극치를 맛보았다. 그것은 니힐리즘의 찬가로 알고 있던 <대지의 노래>를 새로운 삶의 열망으로 느끼게 하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말러의 정신적 고향이자 그를 통해 10년 동안 빛나는 시대를 맞이했던 빈으로 여행의 기수를 돌려 그의 흔적이 닿은 곳이라면 어디로든 달려갔다. 말러가 청년시절 다녔던 빈 대학, 알마를 신부로 맞아 결혼식을 올렸던 카를 교회, 베토벤 행사를 맞아 관악앙상블로 베토벤 9번을 지휘했던 빈 분리파 전시장, 오페라 시즌 중 거주했던 아파트, 죽음을 맞이했던 요양소를 거쳐 어느덧 여정이 말러의 무덤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말러의 묘비는 주위의 다른 비석들과 비교해 볼 때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하고 단순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직접 준비한 하얀 국화를 헌화하고 잠시 묵상에 잠겼다. 말러가 누구이던가! 그의 교향곡은 청춘을 불태우는 화석연료와도 같았다. 무덤 앞에 서게 되니 사춘기 시절 그의 음악이 나의 영혼을 관통하던 순간이 떠올라 벅차 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길 없었다.
--- 머리말 중에서
오페라극장 여러분들께
우리가 함께 일구었던 시간에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되는군요. 이제 나는 소중했던 삶의 일터에서 떠나 작별을 고합니다.
그간 꿈꾸었던 완벽함 대신 불완전한 조각들을 남기고 가게 되는군요. 사람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이.
그간 이루었던 업적이 어떠했는지 평가하는 것이 나의 몫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 한마디는 하고 싶군요. 나는 매우 성실했으며 목표를 높은 데 두었었다고. 물론 나의 노력은 언제나 성공으로 보답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전부를 쏟았고 개인적인 희망보다는 일을, 취미보다는 의무를 중시했습니다.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혹은 분노의 순간에서 우리들은 상처 받고 또 실수를 저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완성되어 성공적으로 공연될 때 모든 고난과 피곤을 모두 잊을 수 있었습니다. 외적인 성공의 표시가 없더라도 진정으로 보상감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노력해서 일하는 이곳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진보시켰습니다.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모두에게 표합니다. 그대들은 난관 속에서도 한없이 충실한 업무로 나를 고무시켰고 도우려 애쓰지 않았습니까. 빈 오페라극장의 환한 미래와 영속적인 성공을 비는 나의 진심어린 좋은 뜻을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행운을 빌고 앞으로도 비상한 관심으로 지켜보겠습니다.
--- 1907년 빈 궁정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직 사임 후 직원들에게 남긴 편지
밤의 어두운 그림자는 강한 말씀에 물러갔으며,
묵상으로 인한 고통도 흩어졌습니다.
나의 망설이는 생각은 하나의 단순한 화음 속에
시든 감정의 힘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나 그대를 사랑하오!' 이 세 단어는 나를 지탱하고 지켜주는,
슬픔과 고통에서 피어난 삶의 선율이오.
'오, 나를 사랑해주오!' 이 세 단어는 나를 떠받치는,
모든 후렴에 붙는 베이스 음이오.
'나 그대를 사랑하오!' 내가 사는 의미를 남기는 세 단어.
진정 기쁨으로 세계를 빼앗아올 수 있습니다.
'오 나를 사랑해주오!' 해변을 쓸어버리는 폭풍우 같은 그대.
나를 축복해주오! 세상에서 죽어갈 때 나의 안식처가 되어주오!
--- 1910년 프로이트와 상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에서 아내 알마에게 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