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현재 걷기가 억압당한 상태라고 말한다.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보고, 앉아서 밥을 먹고, 앉아서 출근하는, 다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고 설명한다. 걷기를 통해 자신을 되찾는 재충전이 필요하고 인간에 맞는 속도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걷기는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이고, 에너지 충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 p.29
나를 기다리는 고독, 나는 과연 그 심연과 맞서 싸워 달콤함을 음미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지닌 모든 이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독이 도피가 아니라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기에 더욱 절실한 질문이다. 고독이 칠판이라면 난 그 위에다 계속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리가 움직이는 한 계속 걸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걷는 기쁨, 혼자 걷는 즐거움을 꼭 전하고 싶다. --- p.33~34
지금은 지식과 정보의 시대다. 지식과 정보를 통해서만 자연을 보려고 한다. 눈과 감각이 퇴화했고, 보고 판단하는 기능을 잃었다. 지금 이 기능을 살려야 한다. 지식으로 보는 것과 감각으로 보는 것은 깊이가 다르다. 지식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윈도우가 세상을 지배하면서부터 엄청난 정보가 쏟아진다. 정보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돼버렸다. 사람은 정보를 다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차피 지식은 버려야 한다. 지식은 소중하지만 편향적이다 사물을 깊이 이해할 때는 감각이 훨씬 우수하다. 눈과 감각으로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시대를 되살려야 한다. 그러면 지식과 감각의 균형이 살아나고 잃어버린 인간성도 회복할 수 있다. 정보를 갖고 가는 여행은 자기 방어적이다. 젊은이들이 감각적 세계가 두려워 겁쟁이가 된 느낌이다. 자연에 동화돼서 본능에 가깝게 여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머리로만 신경 써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목 밑으로는 팽개쳐둔 것 같다. 다른 기관도 머리 못지않게 소중하게 여기고 활동해야 한다.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회적 현상이다. --- p.49~50
아마 오래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사람이 걷는다는 행위는 그냥 단순히 걷는 동작이 아니다. 머리를 움직이는 순간 몸은 가만히 있는 반면, 몸을 움직이면 머리를 가만히 있게 된다. 몸과 머리의 상호작용, 즉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 속에서는 끊임없이 뇌를 작동시키며 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몸을 움직여줘야 하고, 의식적으로 뇌를 쉬어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p.68
걷기는 제게 명상이자 치유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평소에는 잘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나 잘 풀리지 않던 고민도 걷다 보면 스스로 해답이 나오거나 저절로 풀리는 경우를 종종 경험합니다. 방안에 틀어박혀서 아무리 끙끙거려도 집중할 수 없던 게 걸으면서는 신기하게도 절로 명상이 이뤄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말합니다. 자연에서의 걷기, 즉 길은 제게 인생의 학교이자 병원이자 명상의 쉼터라고요. --- p.101
그는 항상 신체와 머리의 균형을 강조했다. 그는 머리를 주로 사용하는 바둑 천재였지만 신체와의 균형을 항상 유지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실천한 선택은 걷기와 등산이었다. (…) 그는 균형을 중요시한다. 바둑을 둘 때도 상대방을 흔드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균형을 잡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발 빠른 포석으로 여기저기 상대방을 흔든다. 흐트러진 혼란은 필히 균형을 잡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때 그는 바둑의 균형감각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다른 바둑기사들이 따라 하기 힘든 본능적 감각이다. --- p.111
사람은 여러 번 죽는다. 이때 죽는 것은 사람의 숨이 끊어진다는 의미와 차원이 다르다. 내가 등산과 야영을 하지 않거나 못하면 난 그 부분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남녀관계를 가지지 못하면 그것도 그 부분에서 죽은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끊어진다는 사실은 이러한 것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 총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등산과 야영을 즐기는 이유는 나의 존재 가치를 등산과 야영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닿을 때까지 등산과 야영을 할 것이다. --- p.128~129
산에 오르는 행위는 굉장히 계획적이다. 육체적으로 힘든 건 전체 20% 정도밖에 안 된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고 어떤 식으로 올라갈지, 산에 올라가기 위한 다양한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을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까지가 전체 과정의 80%를 차지한다. 올라갔을 때 수백 일간에 걸친 프로젝트를 달성한 감격이 있다. 그 성취감이 상당하다. 실제 등반 행위는 20%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육지가 더 위험하고 사고율이 높지 않은가? 산에 오르는 행위가 힘들게 비쳐지는 건 의외다. (…) 난 목숨 걸고 산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원래 취미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도 취미로 다닌다. --- p.162
어쩌면 길을 걷는 행위는 기도의 과정과 동일할지 모른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고, 간절히 소망하고…. 사람들은 이 갈망을 길을 걸으면서 위로받고 힐링하면서 해소한다. 그런 면에서 이해인 수녀와 제주 올레는 비슷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 p.197
어릴 때부터 무모하지만 도전정신은 무척 강했던 것 같다. 클라이머는 퇴로가 없다. 오로지 오르는 길뿐이다. 암벽은 보통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이 따로 있다. 오르는 길로는 내려올 수 없다. 떨어지면 죽는 거고, 죽기 싫으면 올라가야 하는 외길이다. 수술도 마찬가지다. 외과의사가 일단 수술을 시작하면 수술 중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겨내고 끝내야 한다. 어렵다고 그만둔다면 환자의 운명은 그 순간에 끝난다. (…) 도전과 결단과 배짱이 있어야 한다. 나의 그런 가치는 산에서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 p.206~207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 그 자체가 힐링이다. 규칙적인 심호흡과 함께 오감을 통해 느끼는 바람, 새소리, 피톤치드, 햇빛, 숲의 음이온 등은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면서 스트레스가 완화된다. 걷기의 명상적 효과는 걸으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비울 수 있다는 것이다. (…) 매순간의 호흡, 들숨과 날숨, 발바닥과 땅의 친밀감에 집중해서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어느덧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하며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을 아무런 판단 없이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동적 명상이다. 일터 밖으로 떠나 자연에 온전히 몸을 맡기노라면 욕심은 비워지고 겸손을 채워진다.
--- p.238~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