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빚에 허덕이고, 행복해지기 위해 연인과 지지고 볶고, 행복해지기 위해 토끼 같은 자식을 낳아 부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수많은 친구들을 곁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대로 통제할 줄도 모르는 어떤 행복을 위한 삶으로 인해 바보가 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은행을 털거나, 중년의 늦바람을 즐기거나, 세상 끝으로 도망치거나, 탈서구적 정신세계(불교, 반자본주의, 반성장주의 등)에 빠져든다 해도 모두가 헛일일 것입니다. 좀 더 실질적인 차원에서 내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를 끊임없이 저 거짓과 권태의 벽으로 몰아넣는 해피니즘의 악귀를 멀리 쫓아내는 것뿐이니까요.
그러나 내가 나도 모르게 해피니스트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했다고 해서 무조건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먼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행복의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합니다. 행복이란 것을 더 이상 구축해야 할 대상,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이란 나와는 멀리 떨어진 것이라고 간주하던 관습부터 내버려야 합니다. 나는 그동안 행복을 나 자신(나의 존재 변화 과정)과는 별개의 것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가령 행복을 어떤 섭취해야 할 음식이나 추상적인 존재, 혹은 내게 주어진 과제나 완전무결한 당근의 모습을 띤 밝은 미래 정도로만 인식해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든 아니든 간에, 제 강연을 듣고 난 뒤에는 부디 어떤 철학적 변화를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이 행복에 대한 성찰을 마치고 나면, 어디선가 전문가들이 최신 행복의 비법이라며 여러분을 현혹하더라도 그냥 무시해 버리거나 혹은 실소를 터뜨릴 수 있기를요. 흔히 그들은 정식 메뉴에 오른 지 5천 년도 넘는 레시피를 들고 나와 떠드는 경우가 태반이이니까요. “중도를 지켜라”, “불가능한 것을 갈망하지 말라”, “대가를 바라지 말고 줘라”, “지혜, 자유, 사랑을 고양하라”, “공명심과 게으름, 분노를 버려라”, “약속을 잘 지켜라”, “사소한 것에도 기뻐할 줄 알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심호흡을 하라”. 심지어 최근에는 “아빠, 엄마와 화해하라”라든가, 혹은 “목록을 작성해 당신의 삶을 단순화하라” 따위의 비법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의 경연이 가져온 결과가 대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 모든 선의가 모여 종국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옥에서는 누군가의 불행이 또 다른 이의 행복이 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저 슈퍼마켓 행복을 더 이상 갈망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반복적인 실존적 위기를 통해 우리가 장님처럼 멀었던 두 눈을 뜨고 “조금 더 잘 할 수 있다” 주의, 이른바 행복의 영양학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빛나는 통찰력으로 내 자신이 해피니스트였음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칩시다. 거기서 더 이상 열혈 해피니스트로 발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내 자신과 내 청춘이 거짓 연극으로 인해 허망하게 망가지는 꼴을 막아 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증상(평범한 삶)이 아닌, 원인(행복의 추구)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먼저 그 원인이란 것이 대체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원인이란 것이 실은 별 신통치 않은 결과만 가져오는데도, 나는 왜 자꾸만 그리도 그것에 집착을 하는 것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행복의 영양학」중에서
그러나 행복에 대해 묻기 전에 우리는 먼저 행복에 생기부터 부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이라는 화초는 지나치게 세심한 손길과 괴상한 영양식으로 인해 그만 시들시들 죽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바로 ‘철학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부터 내다 버리는 것이다. 몇몇 예를 제외하고, 에피쿠로스 이래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언제나 철학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천편일률적인 자장가를 주야장천 부르고 또 불러 왔다. 물론 각자 자기만의 영양학이나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지혜 등을 조금씩 가미해 가면서 말이다.
행복을 약속하는 것은 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일과 같다. 사실 성직자나 정신의학자, 상인, 호색가들은 종종 신과 동급이 되려는 이런 애교 수준의 작은 죄악을 저지르곤 한다. 물론 철학자도 마찬가지다.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철학은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지적 사기다.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이나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심리 치료,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소비,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종교, 행복의 수단으로서의 나노 수술도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것이 ‘사기’인 것은 만일 인간이 정령 완벽한 행복에 이르는 방법을 이미 생각해 낸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절대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것’을 하세요, 그럼 확실하게 행복이 보장됩니다!’라고 누군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 냈다고 치자. 그러면 이 희소식은 금세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져 나갔을 테고,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버리고 ‘이것’을 향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지구에는 환희와 평화만이 가득 넘쳐흘렀겠지. 아멘.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여태껏 그 어떤 ‘이것’도 모든 이들에게 완전한 위안을 가져다준 적은 없다. 옛 선조의 지혜는 현대인의 번민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다. 과거의 지혜는 너무 모호하고 이상적인 데다, 현대인의 번잡한 삶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국가에서 운영하는 복권 사업은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다. 지식을 도구화한 실용주의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 공리주의도, 계급 없는 사회를 꿈꾼 공산주의도, 양극화라는 파멸을 가져 온 자본주의도, 그 어떤 기존의 이론 체계도 인간에게 영속적인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했다. ‘긍정적인 태도’는 오로지 웃음 강박증에 걸린 히스테리 환자만을 만들어 냈을 뿐이고, ‘대중의 유아화(mass infantilization)’는 바보 같고 창백한 빈혈 환자들만을 양산해 냈다. 그러니 철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또 해야만 하는 일은 이처럼 만병통치약을 들이대며 사람을 잡는 저 선무당들이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우리를 행복에 이르게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보다는, 행복이 대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샴페인 같은 기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