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9년에 태어난 그들의 딸의 세례명은 아드리엔이었지만, 별명은 ‘메르세데스’였다. 스페인어로 ‘은혜’라는 이 이름을 회사 이름으로 지은 것은 돌이켜 보면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1900년경, 옐리넥은 이미 메르세데스라는 이름을 자신의 레이싱 팀과 요트에 모두 쓰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마이바흐에게 같은 이름을 써서 새로운 스포츠카를 만들어 달라고 설득한다. 마치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처럼, 옐리넥은 메르세데스 자동차는 “오늘의 차도, 내일의 차도 아닌, 모레의 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르세데스 브랜드의 어원」중에서
1923년이 되자 대부분의 자동차 전문가들의 눈에는 포드의 단일 모델에대한 집착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모델 T의 판매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차체 변경에도 불구하고, 모델 T는 GM의 다양한 라인업에 비해 구닥다리처럼 느껴졌다. 1924년 모델 T는 마침내 검정 이외의 색상, 엠파이어 그레이, 오리포드 레이크, 또는 코발트 블루로출시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델 T의 내부는 포드가 1908년에 처음 출시한 것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차였다. 쉐보레의 1925년 클로스드 보디 K세단은 듀퐁의 새로운 듀코 래커를 사용한 다양한 색상으로 나왔으며, 상대적으로 모델 T는 우중충하고 낡아 보였다. 그리고 포드는 모델 T 홍보에 거의 돈을 들이지 않았던 반면, GM은 쉐보레 K를 광고하는 데 차 1대당 평균 10달러 가까이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하일랜드 파크와 (루지 강의 거물을 부르는 별명) ‘더 루지’는 GM과 그 밖의 디트로이트 경쟁사에게근로자들을 빼앗기고 있었다. 이제는 포드의 임금이 미국의 산업 평균을 한참 밑돌았기 때문이다.
---「모델 T의 노후화」중에서
의사들은 신속한 왕진을 가능하게 해 준 자동차를 특히 소중하게 여겼다. 도서관에서는 이제 책을 지역사회로 가져다줄 수 있게 되었다. 우편서비스는 엄청나게 개선되었고, 우편 판매가 붐을 이루었다. 부모들이 자녀를 좀 더 먼 학교로 태워 보낼 수 있게 되자, 작은 학교들은 문을 닫았다. 특히 1930년대 초 대공황 기간 중 농업 근로자들은 시골을 버리고 도시로 떠났고, 가족 전체가 자동차나 소형 트럭에 타고 이주했다. 그리고 렌트카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허츠는 (1918년 자동차 대여 사업을 인수하여) 1923년 시카고에서 설립되었고, 1925년 영국에서는 고프리 데이비스가 설립되었다. ---「자동차 시대의 개막」중에서
그러나 1970년대 가장 성공적인 소형차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독일에서 나왔다. 1974년 폭스바겐 골프는 혁신적인 형태와 내구성이 좋은 차체, 높은 잔존 가치, 연료 효율성, 뛰어난 핸들링과 놀라운 성능을 모두 갖추었다.조르제토 주지아로의 디자인은 날렵하고 각이 뚜렷하며 컴팩트했고, 한 마디로 말해서 영국의 알레그로와 같은 라이벌은 고사하고 노르도프가 아끼던 비틀과도 완전히 다른 차였다.---「골프의 탄생」중에서
한국으로 옮겨 간 전직 코벤트리 럭비 클럽의 포워드이자 워릭셔 크리켓 선수였던 턴불은 대부분의 한국 직원보다 몇 사이즈는 더 큰 몸집이었다. 그는 또한 캔리, 카울리나 롱브리지처럼 낡은 작업 관행에 휘말려 있는 공장 분위기와는 너무나 다른 직장 환경을 만났다. 현대차 공장에서 첫날, 한국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턴불은 공장 난방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이윤을 내면 난방을 틀 겁니다.” 정주영이 대답했다. 정주영의 기대대로 턴불은 영국의 자동차 대량 생산 경험을 최대한 활용해 주었다. 그는 영국 최고의 자동차 기술자 5명을 채용하고, 브리티시 레일랜드와 포드의 자동차를 벤치마크로 수입하고, 세계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컨설팅을 하고, 미쓰비시에
서 훌륭한 엔진을 사들였다. 그리고 도착한 지 1년 만에 최초의 진정한 한국산 자동차, 4도어 현대 포니 살롱을 출시했다. 포니는 1976년부터 영국에서 판매했고, 1978년에는 유럽 전역에서 팔리게 되었다. 한국의 습격이시작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독자모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