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님, 우리 식구를 살려 주셔요. 제발 살려 주셔요! 제가 종노릇, 기똥차게 잘하겠나이다. 저는 다 할 줄 압니다. 밥도 잘하고요, 힘도 장사고요 …… 선비님의 두 손과 두 발처럼, 선비님의 입안의 혀처럼, 충성하겠나이다. 부처님처럼 자비로운 선비님, 제발, 저를 내치지 마셔요.” 뚱선비는 껄껄 웃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놈 참, 주둥이 한번 요란하구나! …… 어서, 가도록 하자!”---p.16
나는 용기를 내어 수삼에게 물었다. “혹시 언문도 아세요?” “알지.” 수삼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혹시 저 같은 종놈도 한글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럼! 종놈이지만 언문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배워 훌륭한 글을 쓰신 분들이 여럿인걸. 뭘 배우려면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돼. 너는 언문을 왜 배우고 싶은 건데?”---p.37
뚱선비는 자기도 양반이면서 같은 양반이랑 노는 것을 재미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선비님이 다른 양반 나리와 어울리는 것을 좀체 보지 못했다. 조선에서 무예가 제일 뛰어나다는 서얼 백동수 아저씨, 조선에서 그림을 제일 잘 그린다는 중인 김홍도 아저씨 그리고 조선에서 제일 머리가 좋다는 중인 수삼 형 같은, 지체는 낮더라도 뭔가에 매우 뛰어난 이들과만 어울렸다.---p.53
뚱선비는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누각의 첫째 기둥에 뿌리며 비는 말을 했다. “이 몸이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시구려!” 또 한 잔을 가득 부어 둘째 기둥에 뿌리며 말했다. “창대와 장복이가 내내 건강하도록 도와주시구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누각에서 내려온 뚱선비는 또 한 잔을 가득 붓더니, 말 앞에다가 뿌렸다. “이 말이 내내 건강하도록 도와주시구려!” 날쌘이는 알아들었다고 대답하는 것인지, 술 냄새에 놀란 것인지 힝힝댔다.---p.93
점심을 먹고 봉황산 구경을 갔다. 뚱선비는 구경을 나온 게 아니라 조사를 나온 것처럼 뭐든지 열심히 살폈다. 특히 우물가에서 오래도록 머물렀다. 우물 덮개에서부터 두레박까지 조선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르다면서 한참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그토록 게으르고 한가했던 선비님이 중국에서는 완전히 변하셨다. 가장 부지런했고 가장 바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들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것들을 골똘히 살피고 다니시니 말이다.---p.107
저게 무슨 동물인가?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이 여러 마리 가고 있었다. 말처럼 생겼으나 굽이 두 이니 말은 아니었다. 꼬리는 소처럼 생겼으나 머리에 뿔이 없으니 소도 아니었다. 얼굴이 양처럼 생겼으나 털이 꼬불꼬불하지 않으니 양도 아니었다. 말도 닮고 소도 닮고 양도 닮았지만, 분명코 말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양도 아닌 동물이었다.---p.139
역시 소용돌이에 갇혀 빙빙 돌던 호랑이가 한순간 솟구쳤다. 호랑이 꼬리에 매달려 있던 나도 솟구쳤다. 호랑이와 나는 무사히 소용돌이를 빠져나왔다. 내가 꼬리를 놓아주자, 호랑이는 빠르게 헤엄쳐 달아났다. 나도 가까스로 헤엄쳐 웅덩이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저편 숲으로 들어간 호랑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살려줘서 고맙다, 중국 호랑이야!”---p.158
배에서 내려 언덕에 올랐다. 어디쯤에서부턴가 길바닥은 돌로 되어 있었다. 수레와 말이 어찌나 많은지 길이 막혀 쉬이 열리지 않았다. 마침내 연경성의 한 문으로 들어가자, 사람의 바다, 가게의 바다가 펼쳐졌다. 이제까지 거쳐 온 봉황성에다가 심양성에다가 요양성을 다 합친 것보다도 번화한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