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돼지색깔을 입힌 이 책은 돼지들을 위한 책이라 '돼지책'인가? 제목이 뜻하는 바가 사뭇 궁금해진다. 제목 뿐 아니라 표지그림도 심상치 않다. 어두운 표정을 한 건 엄마 모습을 한 여자 뿐이고, 나머지 셋은 너무나 행복해 한다. 모두 여자의 등에 업혀 있으니, 자신의 몸을 편할 수 밖에 ……. 이쯤되면 감이 잡힐만도 한데, 풍자의 대가 앤서니 브라운은 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걸까?
본격적으로 가정 내에서 여성의 위치와 존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씨의 아내', '○○의 엄마', ○○○호 아줌마', 그것도 모자라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청소해 주는 그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얼굴 없는 여성이 등장한다. '아주 중요한 회사'와 '아주 중요한 학교'를 다니는 한 남자와 두 아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생활하고, 여성은 엄마와 아내의 몫을 다 짊어지고 고개숙인 슈퍼우먼으로 살아간다.
어느날 여성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가족된 자의 몫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근본적인 원칙을 깨우치기 위해 아주 간결한 메모를 남긴다. '너희들은 돼지야." 여성이 떠난 후 모든 것은 예상했듯이 집안은 엉망이 되어가고, 세 남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관심 없는 무기력한 돼지의 모습이 되어간다. 마치 영화 '구미호'를 보는 것처럼, 서서히……. 그리고 엄마와 아내의 존재를 떠올린다.
절정을 지나 결말로 치닫는 속도는 무섭게 빠르다. 아빠는 설거지와 다림질을 하고 두 아들은 침대를 정리하고, 그리고 셋은 엄마가 요리하는 것을 도우며, 재미를 느끼기까지…, 그리고 나서 등장한 건, 처음 보는 엄마의 또렷하고 환한 얼굴, 엄마는 차를 수리하며, 다시 한번 미소를 보여준다. 결말에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겠지만, 보다 중요한 건 '즐겁게' 그리고 '함께'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림책은 흔치 않다. 자칫, 균형을 잃으면 어린이책의 범주를 벗어나기 십상이겠지만, 이 책은 진지한 주제를 곳곳에 숨겨놓은 유머러스한 볼거리로 적절히 균형을 잡아준다. 인간 돼지의 모습을 암시하는 그림자와 돼지문양의 벽지, 벽난로에 새겨진 돼지그림, 돼지시계, 돼지 소금병, 돼지 수도꼭지 ….
공동체를 인지하기 시작하는 어린이들과 가족과 가정에 대한 인식에 신선한 충격이 필요한 아빠가 함께 이 책을 읽는다면, '돼지책'은 '가족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