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닥터 X’라는 익명으로 자신의 인턴생활을 낱낱이 공개하여 파문을 일으켰던 작가는 아직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1981년 국내에 소개된 《인턴 X》는 의학 에세이로는 최초로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쏟아진 어떤 의학 소설보다 더 강렬하고 긴박하며 감동적인 기록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술사가 마술의 비밀을 노출하지 않듯 의사들에게도 사람들에게 알려서는 안 되는 의료 행위와 의료계의 관습이 있다. 하지만 ‘닥터 X’는 1년간의 인턴생활 동안 일어난 사건과 감정을 매일 밤 녹음하였고 한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이 전무후무한 용기 있는 기록은 의사들에게는 의료윤리를 되새겨볼 수 있는 기회를, 일반인들에게는 명예로우면서 한편 오만해 보이는 의사들만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역자 : 양정현
외과 전문의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양정현 박사는 80년대 초입 군의관 시절 《인턴 X》를 번역하였다. 군대에 있지 않았다면 시간에 쫓겨 엄두도 못 냈을 번역 작업을 하면서 그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사명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환자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넉넉한 인품을 지닌 그는 이 책이 세상의 빛을 다시 받음으로써 ‘닥터X’가 염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사와 대중 간의 오해와 편견이 사라지고, 또 젊은 의사들이 자신의 소명을 깨칠 수 있기를 바랐다. 양정현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졸업하였으며, 서울대학교병원 일반외과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 수료하였다. 국립의료원 일반외과 전문의, 삼성의료원 일반외과 전문의, 삼성서울병원 유방내분비외과장, 한국 유방암학회장과 대한내분비외과학회장을 지냈다. 삼성서울병원 진료부원장 겸 암센터장을 지냈으며 현재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외과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당신도 암을 이길 수 있습니다》《옷 갈아입는 의사》《유방과 사랑에 빠진 남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인턴 X》가 있다.
그가 내린 현명한 진단, 적시에 발견한 실수, 최선을 다한 결과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등의 기쁨은 잠깐이고, 부주의, 우둔, 실수, 경험부족 등으로 살릴 수도 있는 환자를 죽게 했을 때의 절망감은 일생 동안 머릿속에서 맴돌게 된다. 뜻밖의 사태를 예상하지 못하거나 의학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무시하며 살아날 수도 있는 환자를 비참한 상태로 빠뜨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은 의사들의 수련교육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가 되어 직업윤리상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금기사항이 되겠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서만이 사람들은 결국 보다 유능한 의사의 진료를 받게 되며 그렇게 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물’로서 소수의 환자가 제단 위에 올려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소수의 희생자란 결국 누구인가? 두렵고 놀라운 사실이지만 바로 당신이 그 비극의 제단 위에 올려질 수 있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선택된 어느 누구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운명에 의해 보다 유능해지기 위한 한 풋내기 의사의 수련에 필요한 제물로서 당신이 선택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pp.15~16
이 도시에 사는 시민들 중 과연 몇 명이나 의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항상 이렇게 진지하게 토론하고 연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진단을 내린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한 일이며 단순한 코감기에도 축적된 지식과 경험의 바탕 위에 최선을 다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얼마나 알고 있을는지 의문스럽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사의 진단이 이러한 꾸준한 자기 연마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움 안에서 떡 받아먹듯 쉽게 얻어지는 것인 줄 잘못 알고 있다. 여기서 비롯된 오해와 분쟁이 곧잘 사회적인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사 전체를 무더기로 시궁창에 처박는 모멸을 뒤집어씌우기도 한다. 의사가 권위를 앞세우던 시대는 분명 지났으나 의사의 인간적 한계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 pp. 224~225
이런 때일수록 의사라는 직업이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 하는 심한 회의에 빠지곤 한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한 직업도 아니고, 조그만 실수에도 심한 눈총을 받아야 하며 보람이란 걸 얻기 위해서는 너무도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외롭고 괴로운 길.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이 곧장 돈과 연결되기 때문에 숱한 오해와 불신과 반감을 의식해야 되고 존경을 말하면서 질시하는 눈초리 또한 무시 못 할 부담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고 의술에 대해 조금씩 알아 갈수록 이 직업에 대한 회의가 너무도 큰 바윗덩어리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의사라는 내 존재가 우선 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그것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