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진정한 세계대전
Q : 마흐디 엘만즈라 교수, 당신은 전에 이 전쟁은 최초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대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의미입니까?
A : 실제로 이것은 최초의 세계대전입니다. 왜냐하면 1914년부터 18년에 있었던 전쟁과 1939년부터 45년까지의 전쟁은, 일본이 후자의 전쟁에 뛰어들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유럽, 서양의 대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91년 1월 17일에 발발한 전쟁은, 최초의 세계대전이었습니다. 이번 전쟁의 목적에는 단순히 경제, 정치, 군사적 성질의 것만이 아니라 문명적 성질의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Q : 걸프전의 영화를 아랍국가들 사이에 공동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한 프로젝트는 유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 : 이와 같은 종류의 프로젝트는 장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은 창조성과 혁신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창조성과 혁신의 풍요한 대지가 되는 것은, 시, 예술, 연극, 그리고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최초의 스텝으로서, 이 영역에서의 모든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성을 환기하는 꿈 또는 상상력을 빼고는 결국 어떠한 활동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창조성이 개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사회의 수립입니다. 불행하게도 제3세계, 특히 아랍·마그레브 세계에는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는 항상 방해받아왔습니다. 시민사회의 건설이야말로 서방과의 관계도 포함하여 우리들 모두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기초가 되는 것이므로 더더욱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들이 상호관계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자세를 보이고, 자율적으로 밀고 나가는 능력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우리의 국제관계는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남남관계, 특히 아랍 각국간의 관계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아랍 각국은 창조와 발명에 관한 모든 영역에서 공통행동을 취해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태동하고 있는 이런 종류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키려고 하는 행정적·관료적 시도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마그레브와 아랍의 지식인은 스스로의 책임이 무엇이고 이 위기적 정세 속에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냉혹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과제에 맞붙을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진다면, 우리들은 생존의 문제, 즉 문명의 생존, 문화적 다원주의 생존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문화적 다원주의가 없으면 인류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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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의 한쪽 주역 사담 후세인 Saddam Hussein
현 이라크 대통령인 후세인은 1937년 4월28일 바그다드 북쪽 티그리스강에 면한 타크리트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반 십자군의 영웅 사라딘의 고향이기도 하고, 후세인은 현재 측근을 타크리트 출신으로 둘러싸고 있다. 그는 생후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잃고 숙부 밑에서 성장했으며, 고교시절 바그다드로 옮겨 바트당에 입당하고 반 왕제 폭동에 참가했다. 이라크 혁명(58년)으로 공화제로 바뀐후, 카셈 수상(쿠웨이트의 영유권을 주장한 최초의 이라크인 정치가)의 암살계획에 가담했으나 이것이 실패하자 이집트로 망명했다. 63년 2월, 바트당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귀국. 그러나 9개월 후 바트당의 실각과 동시에 투옥되고, 3년 후 석방되었다. 그 2년 후인 68년 7월 17일, 바트당이 다시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한 쿠데타에서(이 날은 그후 국경일이 되어있다)지도적 역할을 하고 국가최고기관인 혁명지도평의회(RCC)부의장으로 발탁된다. 의장은 같은 타크리트 출신의 바크르 대통령이었던 관계로 그 연줄에 의해 명실공히 이라크의 제2인자로, 동시에 아립의 '새로운 별'로 떠올랐다. 그 후 79년 바크르 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 RCC의장, 수상, 최고사령관 및 바트당 서기장이라는 최고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오늘에 이른다. 다음 해 9월, 혁명으로 흔들리는 이란을 침공, 장기화하고 있던 국경분쟁을 일거에 해결 짓고 낫세르 이후의 아랍의 맹주로서 바그다드로 개선하려고 했으나 이란군의 예상 밖의 저항을 만나게 되고 이후 8년간을 진흙탕 전쟁에 휘말렸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는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협력으로 간신히 우세승을 거둘 수 있었다. 후세인은 이라크의 제2인자가 된 이래 15년간에 7회의 암살사건을 조우했으나 그때마다 위기를 모면하고,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에는 21명의 고급관료를 처형하고 지위를 확고히 했다. 걸프전에서 미국 및 다국적군의 압도적 군세에 의한 공중·지상전으로 5만 명에 이르는 이라크 젊은이들을 전장에서 희생시켰지만, 후세인은 여전히 걸프전의 주역으로 살아남아 굳건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걸프전 이후 10년이 넘는 경제제제 조치로 국가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지고 민중의 생활상은 극도의 궁핍속에 50만의 어린이가 굶주림의 희생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바그다드를 비롯한 아랍세계의 친 이라크 국가에서는 여전히 후세인을 "미국이라는 강대국과 맞선 아랍세계의 영웅"으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pp.281-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