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로마의 고전 문명을 흠모하는 인문주의 전통 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 고대 노예제는 한동안 옥에 티처럼 애써 외면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도덕적·종교적 입장에서 노예제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제 고대 노예제는 관점을 달리하는 역사가 사이에서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1848년의 공산당선언 이후, 고대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와 서구 부르주아 역사가들 사이의 논쟁은 전장으로 표현될 정도였다. 고대 노예제는 역사적 현상이라기보다 정치적 쟁점이 되었던 것이다. --- pp.18-19
매해 동지 무렵에 벌어진 사투르날리아 축제 동안 로마인들은 고정된 사회적 경계를 완화해서 노예들에게 평소 허용되지 않던 형태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1년에 수 일 동안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노예제가 존재하지 않던 아득한 신화적인 시대를 상기했다. 그렇지만 축제의 휴일이 끝나면 노예와 자유의 ‘정상적’ 구분이 신속히 복구되었다. 사회적 지위를 고도로 의식하는 로마 세계에서는 아무도 비자유인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없었으며, 사투르날리아는 결코 사회적 변화나 개선의 비전을 고취하지 못한 일시적 파격에 지나지 않았다. --- p.49
기원전 130년대 시칠리아에서는 대규모 노예 반란이 일어났고, 이탈리아에서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발생해 노예 소유주들을 놀라게 했다. 노예 반란을 경험한 노예 소유주들은 농장 노예들을 통제하는 데 처벌의 공포를 이용할 뿐 아니라 노예들의 지위에 따라 페쿨리움이나 보상, 회유책 등도 활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 농장 노예들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인 처우는 노예 공급의 감소나 인도주의를 반영했다기보다 노예 소유주들이 노예노동을 좀 더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의미했다. --- p.95
제국 주민은 켄수스(인구조사) 때 자신의 원적지로 돌아가야 했는데, 소작인의 원적지는 지주의 소작지였다. 소작인들에게 지주는 주인이자 지방 당국의 대표자가 되었다. 소작인들의 도주를 방지하기 위한 원적의 원리가 소작인들을 토지에 결박했다.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예속 소작인들의 새로운 계급이 자유인과 노예 사이의 옛 구분을 종결지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지방적 권위로부터도 독립적이면서 황제에게만 고분고분한 새로운 지주계급이 형성됨으로써 제국 말기에는 이미 봉건사회의 징후들이 나타났다. --- p.149
한 사회가 충분한 노예 공급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정복이 아니라, 사회 외부에 체계적으로 끌어낼 수 있는 잠재적인 노예노동의 ‘저수지’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이나 포르투갈과 영국의 노예 상인들은 노예노동의 저수지에 접근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전쟁을 했으며, 고대 그리스인들은 노예의 주요 원천인 동부와 북동부의 ‘야만인들’을 놓고 체계적으로 전쟁을 벌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노예제사회가 출현한 것은 정복 전쟁의 부산물이 아니며,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정복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 pp.167-168
가족생활이 허용된 노예들은 그렇지 못한 노예들보다 더 나은 지위에 있었으며, 이런 점에서 도시 노예들이 농촌 노예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예 가족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주인이 매각하고, 가족이 분리되어 유증되는 등 노예 가족의 전망이 노예들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에 달렸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예 소유주에게는 노예 가족이라는 수단을 통해 노예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 p.224
로마인들이 유언장으로 대규모의 노예를 무차별적으로 해방하는 실례가 빈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언장을 통한 노예해방의 모든 손실은 유언자의 상속인들에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속인들은 노예들을 상실할 뿐 아니라 노예해방세를 납부해야 했다. 죽은 후 관대하다는 명성과 일시적인 화려한 장례식을 위해 자신의 상속자들에게 심각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하는 대규모 노예해방을 명령하는 유언자는 현실적으로 드물었을 것이다. --- p.240
노예해방은 로마 노예제의 두드러진 특성이었다. 로마 세계의 노예 소유주들은 노예를 해방하는 데 그리스인들보다 더욱 관대했으며, 일부 노예에게 노예 상태는 항구적이 아닌, 벗어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해방된 피해방인은 법적으로 자유인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로마 시민권을 얻어 시민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로마인들의 노예해방은 피해방인을 시민이 아닌, 거류 외인의 범주에 포함한 아테네인들의 그것과 대조된다. 피해방인에게는 자유를 준 전 주인을 보호자로 삼아 일정 기간 전 주인에게 복종하고 다양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조건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해방을 통해 노예의 운명은 극적으로 변했다. --- p.255
제정으로 접어들면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줄어듦에 따라 각종 경기장과 극장은 황제와 시민들이 극적으로 대치할 수 있는 빈번한 기회를 제공했다. 역사상의 대제국 가운데 로마제국은 황제와 수도의 대중이 빈번하게 한자리에 모이는 것을 허용한 유일한 제국이었다. 때때로 관중은 곡물 가격이 비싸다고 소리 높여 항의했고, 인기 없는 정무관을 처형하라고 외쳤다. 한 번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공중목욕탕에 있는 조각상을 황실로 가져간 것을 경기장의 관중이 반환하도록 요구했고, 황제는 그 요구를 수용했다. 극장의 대담한 배우는 정치적 비난의 대사나 몸짓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 p.279
노예 반란의 산물로서 새로운 국가가 출현한 것은 역사상 지극히 드문 현상이었다. 유일한 실례는 생도맹그에서 투생 루베르튀르가 이끈 노예 혁명에 뒤이어 1803년에 아이티에서 국가가 창설된 것이었다. 생도맹그 혁명의 기원과 전개는 프랑스혁명의 넓은 맥락과 관련되어 있었다. 고대 시칠리아의 노예들이 살던 시대와 달리, 생도맹그 노예들이 반란하던 시대에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공식화되어 있었다. 반면에 시칠리아에 노예 국가를 수립하는 것은 그 섬의 유산자들(로마인들과 지역 엘리트들)과 로마 정부의 승인이 필요했을 것인데, 로마가 그러한 특권의 강탈을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 pp.304-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