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서울이 되어버린 외가가 있는 능동은 아차산 밑에 맑은 개울이 흐르는 조그만 마을이었습니다. 그 개울의 맑은 물 속에 잠겨 반짝이던 자갈돌들의 투명한 빛이 저의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게 해준 첫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도 빛을 그릴 수 있을까...? 생명의 실상의 빛을..." 저의 예술의 길은 빛에 대한 찬탄과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저는 이 세상에 빛이 아닌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만상은 물론 검은색에도 빛이 있음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랑도 빛이고, 자비도 광명이며, 지혜도 마음의 빛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빛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밖으로부터 오는 빛, 안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빛, 사물 자체의 깊은 속으로부터 베어나오는 빛, 마음의 창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빛, 이 모든 빛들은 어둠을 뚫고 서서히 열리면서 안으로 밖으로 넓게 퍼져나가 우주만상을 비춰주고 있습니다.
--- pp. 20
일본 천황이 그 미지근한 목소리로 라디오를 통해 항복하던 날, 세계는 치를 떨며 악몽에서 깨어났습니다. 해방이 되자 일본 아이가 떠나며 주고 간 일본 인형을 넝마공장에 던져버리던 날, 그날도 저는 무서운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버린 인형이 일본 병정을 몰고 저를 잡으러 쫓아다녔습니다. 저를 빙 둘러싸고 번쩍이는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 칼들이 제 목을 치는 순간 저는 '악' 소리를 치며 깨어났습니다. 그들이 떠난 지 46년... 그들은 갔지만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박힌 그 공포로부터 우리는 참으로 해방되었을까요? 저는 프랑스에 오래 살면서 많은 일본인을 만났지만 자기 민족의 만행을 부끄러워하는 일본인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 pp.126~127
이국으로 향하는 설레임과 함께 고국을 등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슬픔에 저는 가슴이 터질 듯했습니다. 그러나 멀리 떠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굳게 믿고 외로운 길, 자유의 길, 예술의 길을 떠났습니다. 광대한 바다, 거센 파도에 던져진 하나의 풀잎 같은 배, 그 작은 배를 타고 떠나는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돛을 올렸습니다.
1961년 3월 25일 지구의 남쪽, 그 많은 나라들을 거쳐 사흘간의 비행기 여행을 마치고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자유와 예술의 도시로 그토록 동경하던 파리는, 어둡고 음산한 하늘 아래 검은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파리의 참모습을 마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어두운 파리가 속으로 품고 있는 진수를, 그 밝은 빛을 볼 수 있을 때까지 참으로 기나긴 굴을 뚫고 나아가야 했습니다.
--- pp. 53~54
대우주의 생명체 속에서 티끌만한 우리들이 서로 만나 30년간의 긴 시간을 함께 살면서 슬픔과 기쁨의 바퀴를 돌고 돌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언어, 문화, 풍습이 전혀 다른 낯선 땅에서, 서로 피가 다른 두 사람이 함께 깊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상의 톱니바퀴는 불협화음으로 쉽게 맞물리지 못했고 뿌리까지 뽑힌 듯한 자아의 갈등에서 헤맬 때가 맞았습니다. 30여년이 흘러간 이제서야 겨우 민족과 국가를 넘어선, 만남의 자리에서 서로의 편안한 숨결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그는 친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내 세포는 온통 한국 세포예요"해서 우리를 즐겁게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세포는 온통 프랑스 세포예요"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이나 프랑스를 다 초월한 새 생명의 세포를 노래하고 싶습니다. 대우주 생명체의 새 세포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 pp. 159~160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랑과 고독을 자양으로 해서 무르익은 열매를 맺는 나무의 품성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어느 때는 웃음의 폭포 같은 꽃을 가득 안으며 춤을 추기도 하고, 어느 때는 거센 폭풍에 떨며 온몸을 앓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 홀로 서서 그 무서운 세상의 질풍을 묵묵히 받아들여야 되는 것도 예술의 몫입니다.
고등학교 때 그림을 그리도록 이끌어주신 은사님께서는 그림에 대해 전혀 소질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예술가는 손으로 그리는 재주보다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림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라는 격려와 그 가르치심에 힘입어 저는 예술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옛 어른들의 글 중에도 "잘된 그림이란 실제 참모습을 그리는 게 아니네", "너무 하구먼! 그이의 그림 됨됨이란 게 사물을 똑같게만 그리거든!"(연암 박지원 수필집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중에서) 하신 것을 보면 그림은 재능을 넘어서서 마음의 눈으로 보는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pp.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