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해라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방범키를 열었다. 그녀는 익숙한 손짓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오른편으로 바닥에서 천정까지 닿은 붙박이장이 있었는데, 그 장은 전면 유리로 되어 있었다.
해라는 힐끔 돌아보다가 흠칫하고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썹 아래로 빨간 멍이 내려오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역시나 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제 시간에 도착하기에 좀 빠듯한 시간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다.
미간을 찌푸리고는 곧 시퍼런 팬더 눈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으쓱하고는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와 거실을 가로지르던 해라는 잠시 움찔했다. 막 주방에서 나오는 남자와 마주친 것이다.
그것도 거의 전라의 몸으로 나오는.
‘거적때기라도 좀 걸치지.’
언제나 봐도 영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아무리 자기의 집이라고 해도 남자가 아무 것도 걸치지 않고 집안을 활보하는 것이었다. 해라는 내심 혀를 차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다.
타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말을 하지 못 하는 것이다. 그건 해라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허리에 커다란 목욕 타월을 걸친 남자는 아주 잘생겼다. 마치 그림을 그려놓은 것처럼. 서서히 커지는 눈에 이어 천천히 바래는 낯빛만 아니라면.
“네 꼴이 대체…….”
가끔 보면 참 호들갑이다. 누가 보면 나를 아주아주 걱정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겠네. 정말 그렇다고 해도 전혀 달갑지 않아.
“아직 옷도 안 입고 계시면 안 되는데.”
해라는 내심 투덜거리며, 미간을 찌푸린 그의 시선을 피하며 우회적으로 늦었다, 혹은 사람이 올 시간이 되면 뭐라도 좀 걸치고 다녀라, 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네가 골라줘.”
“싫어. 또 코디가 안티냐, 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난 네 코디가 아니야.”
“네가 골라주든 안 골라주든 코디가 안티냐, 하는 소리는 듣게 되어 있잖아. 그리고 그 눈 왜 그래?”
“그러게 옷 좀 사시라니까.”
자다 침대에서 떨어졌다는 소리를 하면 또 석 달 열흘은 우리고 우릴 것이 뻔하기에 해라는 몰라요, 나도,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아.”
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옷들이 하나같이 거의 신석기 시대의 유물수준이니.”
“귀찮다고.”
“이해할 수가 없네.”
“뭐가?”
“쇼핑이 귀찮다는 양반이 협찬 받은 옷은 왜 굳이 돌려보내? 그냥 계속 입어달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산 옷이 아니잖아.”
“그래도 주면 그냥 모르는 척 받으면 되잖아. 다들 그래.”
해라는 투덜거리며 그의 침실로 걸어 들어갔다.
“귀찮아.”
“또 뭐가 그리 귀찮아? 받아서 옷장에 거는 게?”
“그런 거 하나 받으면 또 그 사람들 신경 써야하고, 쇼에 초대하면 응해야하고.”
“사진도 찍어줘야 하고?”
“그렇지.”
“그렇게 귀찮은데 밥은 어떻게 먹어? 아예 숨도 쉬지 말지? 귀찮아 죽겠는데.”
“내 말이 그거다. 하나면 하루 종일 배가 부르는 알약 누가 발명 좀 안 하나? 숨은 죽지 못해 쉬고 있다.”
해라는 더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남자를 힐긋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그의 옷장을 보았다.
정다훈, 걸어 다니는 기업, 그가 찍어내는 광고 한 편의 효과가 여느 중소기업 연매출과 맞먹는다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것이라고 결코 믿을 수 없는 빈약한 옷장을 보며 해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낡은 청바지 류, 목이 늘어난 티셔츠 류, 몇 벌이 되지 않은 재킷 류 등 도저히 이 남자의 수입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옷들이었다.
평소라면 촬영 전 협찬을 받은 옷들을 가지고 올라오기라도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드라마 촬영이 있는 날이다. 최근 들어 연달아 시대극을 찍었고, 현재 촬영하는 것 역시 시대극이기에 의상은 모두 촬영장에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러니 이 남자가 이렇게 벗고 집안을 활보하고 다니지, 라고 생각하며 해라가 그 중에서도 그마나 머리를 간신히 쥐어짜서 꺼내놓은 것이 거의 한 달 동안 입지 않은, 가장 최근에 산 것처럼 보이는 티셔츠와 청바지였다. 그것도 그녀가 기억하기로는 이 년 전에 참다 참다 다훈의 생일을 빙자해서 사준 옷들이었다.
이나마도 챙겨주지 않으면 낡아서 구멍이 난데다 철에 맞지 않은 한 여름 청바지에 바닥을 닦을 때나 사용하는 것으로 재활용이 될 셔츠를 입고 나와 인터넷 유저들이 흔히 말하는 ‘코디가 안티, 짤’이 생성될 것이 뻔했다.
청바지, 티셔츠와 색감을 맞춘 재킷을 꺼냈는데, 얼마나 입었는지 팔꿈치가 해져있었다.
해라는 끙,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휘휘 돌렸다. 구석에 끈이 떨어져서 뒹구는 가죽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해라는 무심코 상체를 숙여 가방을 들었다. 이내 그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이 가방은 그의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해라의 부모님이 사 준 것이다. 이후로 내내 이 가방만 들고 다녀 가죽이 허물을 벗듯 벗겨지고 끈이 떨어지고 나서야 종적을 감추었는데, 버리지 않고 여태 이 옷장 구석에 놓아두었던 것이다.
가방의 겉모양은 볼품이 없어도 어찌나 깔끔하게 관리했는지, 이 가방이 제조되어 사용해온 세월을 따지면 삭거나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하다 생각하며 해라는 혀를 내둘렀다. 하긴 낡았지만 잘 관리되었다. 이 옷장에 있는 의류, 잡화, 모든 것이 그랬다.
“대체 돈을 벌어 다 어디에 쓰지?”
해라는 그것마저도 기가 차 투덜거렸다.
“쓸 시간이 있어야 쓰지.”
하긴 그가 한 말이 사실일 것이다. 그는 현재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다방면으로 바쁜 사람이었다.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영화, 영화가 끝나면 음반작업, 음반작업이 끝나면 광고촬영을 겸한 음반활동, 그렇게 정신이 없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가 되면 또 다시 도돌이.
그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자신이 한 말을 근 5년 째 행동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걸어 다니는 1인 기업’이라는 별칭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로 돈을 갈퀴 째 긁어모으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더욱이 그는 자린고비가 아니었다. 오히려 통이 크기로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재단에 기부하는 돈은 대중에게 알려진 것만으로도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사실 세간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촬영하다가, 혹은 어쩌다 알음알음 알게 된 단체에 몰래 기부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고, 특히나 함께 일을 하는 스텝의 경조사에 그 누구보다 거금을 쾌척하고는 했다.
적어도 써야할 데는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귀찮아서, 혹은 시간이 없어 쇼핑을 못한다는 그의 말은 진실이다. 그러니 더 답답하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그의 이름 석 자만 치면 무수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었는데, 상위로 랭크된 것이 모두가 ‘이 얼굴 이렇게 쓰려면 나주지.’ 라고 사람들이 한탄하게 만드는 그런 류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양산되면 양산 될수록 손가락질을 받는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매니저인 해라였다.
물론 그녀 역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다주고 협찬을 받아다 주고,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했는데, 잠시 한 눈만 팔면 이런 거지같은 옷들을 걸치고 나와 사람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꼭 그런 꼴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파파라치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이미지만을 노려 대서특필하고 사람을 쌍으로 웃음거리로 만들고는 했다.
몇 번 그런 이미지가 생겨나니 이젠 코디들이 다훈과 함께 일하려하지 않았다. 하긴 ‘코디가 안티.’ 라는 소리를 매번 얻어 듣고 싶은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유명 코디들 역시 손을 들었고, 종래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야 만 사람 또한 다름 아닌 해라였다.
이후로 다훈을 대신해 쇼핑을 하지 않게 되었고, 협찬도 애써 받아오지 않았더니, 그의 옷장은 요즘 시대에는 재활용도 되지 않을 옷들만 가득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주 못 입을 옷이라는 뜻은 아니다.
“일단 이 옷으로 입어.”
그렇다고 매니저의 업무를 방기할 수는 없으니 가까스로 고른 옷을 건넸다. 다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옷을 받고는 아무 생각 없이 허리 아래를 간신히 가린 목욕타월에 손을 댔다.
“아, 좀!”
해라는 벌컥 짜증을 내며 몸을 획 돌렸다.
“왜 갑자기 내외해?”
더 놀란 것 같은 표정으로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에 대해 속속들이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진심으로 더 놀랐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표정 또한 압권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과 아귀다툼을 한 것이 어디 한두 해였던가.
능구렁이 같은 놈.
그를 한 번 쏘아본 뒤 해라는 이를 바득 갈고는 몸을 획 돌려 팔꿈치부분이 해진 재킷과 가방을 들고 침실에서 나왔다. 불만스러운 기운을 애써 삭인 발걸음으로 거실로 나와 서랍장을 열고는 가위와 반짇고리를 꺼내들었다.
“참, 커피 내리다 말았는데.”
바느질로 낡은 가죽가방의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부분을 타원형으로 잘라 재킷 팔꿈치 부분에 덧대고 있는데 옷을 입은 그가 침실에서 나왔다.
사실 지금 그녀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안색을 보면 모르나? 그 속에 커피를 들이부어? 누구 죽으라고? 하는 표정으로 그를 힐끗 노려보고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어, 어, 어……. 너 뭐 해?”
그가 뜨악한 표정으로 해라를 보았다.
“보면 몰라?”
“뭐 하냐고, 지금.”
“재킷 수선 중이잖아.”
“내 말은…….”
물론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뭐?”
하지만 시치미를 뗀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야! 장해라! 너 죽을래? 이건, 이건…….”
후다닥 다가와 조각이 난 가죽을 들고 부르르 떨었다.
“쓰레기지.”
“뭐? 쓰, 레. 기?”
“그래, 쓰레기.”
“이, 이, 이게 진짜.”
심지어 잔해를 든 채로 이까지 바득바득 갈았다.
“설마 쓰레기 저장강박증이냐? 왜 이런 걸 여태 모셔놔?”
해라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팔꿈치가 해진 재킷에 가죽을 덧대어 패치워크를 했다.
“이 멀쩡한 걸, 그것도 어머니가 사주신 걸.”
“멀쩡해?”
“끈만 수선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는 아주 멀쩡한 거라고.”
“야, 눈이 있으면 봐라. 그게 쓰레기지 가방이냐?”
“네가 잘라내기 전에는 분명 가방이었다고.”
“웃기고 있네. 내가 자르기도 전에 이미 쓰레기였다고. 쓰, 레, 기. 한마디로 재생 불가능, 쓸모없게 된 물건, 쓰레기였다고, 알아?”
해라는 흥, 콧방귀를 뀌고는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잔뜩 부은 얼굴이거나 말거나, 나는 내 갈 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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