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말한다. “유일신이 왜 그렇게 위대해졌는지를 아는가? 그건 인간이 왜소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종교나 절대적 권위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라지 않는 영원한 어린아이와 같다. 무엇에 의지할수록, 자신이 혹시 절대자의 뜻과 어긋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될 터다. 그래서 그는 더욱더 나약해진다. (…) 무기력과 나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라! 니체가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들에게 던지는 첫 번째 충고다. ---「안주하는 모범생의 삶을 벗어던질 용기」중에서
남의 잣대에 맞추어 눈치 보며 사는 삶은 늘 불안하다. 진정한 행복은 자기 스스로 꿋꿋이 설 수 있을 때 찾아온다. 어떻게 해야 당당하게 혼자 서는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까? 칸트는 여기에 답을 주는 철학자다.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미성년의 원인은 이성이 부족한 데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결단과 용기가 부족한 데 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게 어렵다면」중에서
젊은 시절에는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에 휘둘리지만, 나이 든 이들은 더 이상 서두를 이유가 없다. 결승점에 다다른 사람은 다시 출발점으로 가기를 원치 않는다. 마찬가지로 제대로 삶을 보낸 이들은 ‘오랜 항해 끝에 마침내 항구에 들어서는 것처럼’ 나이 듦과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나이 듦에 대처하는 자세」중에서
어느덧 정신없이 바쁜 생활은 내가 얼마나 유능한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잣대처럼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모습이 과연 바람직할까? 로마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죽을 때까지 분주한 것이 그렇게 부럽습니까?” ---「허둥대는 일상과 작별하고 싶을 때」중에서
라캉은 이렇게도 말한다. “욕망도 연습해야 는다.” 내 마음속 다섯 살 아이의 ‘보호자’로서 세상을 대해보자. 누군가 나에게 부당한 부탁을 했다면, ‘내 부모님이 옆에 계신다면 나를 위해 이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실까?’라고 생각해보라. 어른이란 다른 이들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삶을 가꾸어나가는 사람이다. ---「나의 보호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중에서
우리는 네 살 아이처럼 과자를 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혜를 누리고픈 갈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바람을 누군가가 감히 펼치려 할 때, 격렬한 감정이 솟구쳐 오를 테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내 안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일이다. 내가 싫어하는 상대의 모습이 나의 감춰진 속마음이라는 뜻이다. ---「내 안의 그림자를 돌보는 법」중에서
세상을 바꿀 만한 큰일은 혼자서 해낼 수 없다. 성공을 거둘수록 일의 규모도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위임은 가장 중요한 능력으로 떠오른다. 자기 책임과 권한을 남들에게 얼마나 잘 넘기는지를 보면 그 사람의 그릇을 가늠할 수 있다. 그대의 인간됨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가? ---「나는 왜 남에게 일을 맡기면 불안할까」중에서
누구에게나 일상은 구차하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법이다. 전체를 위해 뭔가를 한다는 느낌은 내가 남보다 더 나은, 숭고한 일을 한다는 환상을 준다. 훈장이나 상장이 지닌 위력을 생각해보라. ‘표창’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종잇조각은 사람을 얼마나 우쭐하게 만드는가! (…) 많은 사람들이 이렇듯 집단이 주는 환상에 빠져 자신을 기꺼이 내던진다. 이제 자신을 점검해볼 차례다. 집단이 내세우는 명분이 과연 정의로운가? 나는 단지 멋진 장식이나 문구,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