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서 그 까닭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사회과학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어떻게 연구하고 있으며, 왜 그렇게 연구하는가를 ‘성찰’하는 데, 아니 더 근본적으로 ‘왜 연구하는가’를 고민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진단입니다. --- p.5
이러한 문제에 포함된 쟁점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당연시해온 믿음과 가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연구에 관한 그들 자신의 생각과 세계관의 핵심 요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학생들에게는 이 과정이 혼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흥미진진하다. 거의 예외 없이 학생들은 그 노력과 불편함이 매우 가치 있었다고 내게 토로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러한 경험이 자신들의 지적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경험은 유용한 연구를 수행하는 그들의 능력에, 그리고 사회과학 일반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중요하고도 오래 지속되는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과제를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기를 바란다. --- p.15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고자 할 때, 사회연구자들은 연구하는 사람들과 맺기를 원하는 관계의 종류 그리고 사회연구자들이 맡을 역할의 종류, 두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 한쪽 극단에서는 연구자가 자신이 탐구하고 있는 사회현상에서 벗어나, 외부자로서 그 현상을 관찰하도록 허용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다른 극단에서는 연구자가 사회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고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이러한 내부자의, 그리고 개인적 경험을 사용한다.
선택은, 연구 참여자들에게서 ‘전문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사회세계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전자에서 연구자는 초연하고 분리된 상태인 반면 후자에서는 심지어 집단이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연구 참여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연구자는 자신이 연구 참여자에게 영향을 받을 수도 있고 그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 p.33~34
귀납주의자는 관찰에 관한 두 가지의 중요한 가정을 가진다. 하나는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시작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찰이 지식의 확실한 기초―관찰에서 지식이 도출될 수 있는―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퍼는 모든 관찰이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우리가 대상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갖기 전에는 대상을 보고 관찰할 수 없다는 점이 자연과학에서보다 사회과학에서 훨씬 더 명백하다. 왜냐하면 사회과학의 대상들은 대부분―전부가 아니라면―추상적 객체, 즉 이론적 구성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존심’은 실업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에서 기계적으로 귀납할 수 없는 이론적 개념이다. 우리는 무엇을 관찰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그것을 볼 수 있다. --- p.128
남성중심적 과학에 대한 여성주의의 비판은 자유주의적인 것에서부터 급진주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하다. 이런 입장 가운데 자유주의적 극단에서는, 남성이 과학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만들고 과학 조직에서 지도력과 권력의 자리를 남성들이 지배하게 만든 불공정한 고용관행에 주로 비난의 초점을 맞춘다. 그다음 조금 더 급진적인 비판은 연구 문제의 선택과 정의에서의 편견에 관심을 갖는다. …… 더 급진적인 또 다른 비판은 ‘근본적인’ 남성적 특징과 여성적 특징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영속화해온 일련의 엄격한 이원론(객관적/주관적, 이성/감정, 정신/육체, 사실/가치, 공적/사적, 개인적/집단적, 자아/타자 등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급진적인 비판은 전통적인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라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 p.30
비판이론은 세계가 관찰자에게서 독립된 사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객관주의의 환상을 기각했다. 진리는 관찰에서 얻는 증거의 문제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공정한 비판적인 토론을 통한 ‘이상적 발화 상황’에서 달성된다. 이러한 진리합의이론은 이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 제약과 왜곡 요인에서 자유로운 능력 있는 사람들이 합의를 달성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 비판의 능력은 인간해방에 대한 이해관심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근래의 일부 비판이론가들(예컨대, 페이)은 실용주의적 진리관을 채택하고 있다. 즉, 구조적 갈등과 모순이 야기하는 절박한 필요를 충족하고 결핍을 극복하는 행위를 이론이 이끌어낸다면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