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첩 같은 걸 다시 내려다보았다. 세상을 다 빨아들일 듯 시커먼 표지가 엄청난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열쇠 같은 거야. 거기 이름을 올리면 신들의 세상에 갈 수 있어.”
……“거울문자로 써야 돼. 하지만 인간세상의 사람은 이름을 올릴 수 없어.”
바늘이 닿자마자 바람 새버리는 풍선처럼, 부풀었던 가슴이 확 쪼그라들었다.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수첩 표지를 긁적긁적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닿은 자리에 흔적이 깊게 남지 않는가.
‘킬킬. 역시 찾아내는 군. 어서 써 봐. 네 이름을.’
난 망설이지 않고 새까만 표지에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내 이름을 썼다.
“너 정말 똑똑한 애구나! 단추처럼 반짝반짝!”
“풋, 왜 하필이면 단추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이름이 사라졌다. 수첩 표지가 이름을 먹어 치운 것처럼,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 듯 감쪽같았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야릇한 기분.
- 문신을 만나다 중에서 (p22~p27)
“할 얘기가 왜 없어, 새끼야!”
꿈을 꾸는 거 같았다. 느닷없이 내 주먹이 나가더니 성찬이가 배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나는 몹시 놀랐다. 내가 정말 이렇게 세단 말야?
“너 그따위 비열한 짓 또 하면…….”
이번에는 발이 날아갔다. 마치 줄에 매달린 막대인형이라도 된 거 같았다. 누군가 내 몸을 조종하는 것처럼 내 팔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성찬이는 걷어차인 옆구리를 팔로 껴안은 채 나가떨어졌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줄을 잡고 있는 놈은 내 입까지 조종하는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처음으로 사람을 때렸는데 그 기분은 놀라웠다. 전기가 모이고 거기서 전력이 굽이치듯 다리 끝에서 머리끝까지 찌릿하게 솟구쳐 올라오는 느낌. 마치 다른 낯선 세계에 잠깐 갔다 돌아온 거 같았다.
“이건 아니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는 문신의 목소리는, 내 안에 있는 덩어리의 소곤거림에 묻혀 버렸다.
‘나쁜 녀석 혼내주는 게 이런 거야. 괜찮지? 그렇지?’
- 문신을 만나다 중에서 (p33)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가까운 사이처럼 흉허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나눈다기보다 의사가 별다른 대꾸도, 참견도 없이 듣기만 하는 쪽이지만. 나는 별로 중요할 것도 없는-내 판단이다-내 말에 저토록 귀 기울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구나. 네 마음을 나도 충분히 이해하겠어.” 하는 표정으로 들어주는 사람을.
그런데 횟수가 거듭되면서 나는 뜻밖에 후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진심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면서, 겉모습 안에 숨어 있던 내 다른 모습들이 밝은 빛 아래 처음 드러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 “그래, 너도 잘 알거야. 바람은 물 위의 배를 앞으로 가게도 하지만 뒤집기도 해. 네가 읽는 책들이 너라는 배를 나아가게 하는 바람이 되게끔 하는 것도 네 몫이야.”
……“사람의 기가 분노나 파괴 쪽으로 쏠릴 때는 엄청난 에너지를 낸단다. 그걸 잘 다스리지 못하면 폭력이 되기도 해. 폭력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정작 문제 해결에는 도움 안 될 때가 많아.”
……“내 말 알겠지? 분노와 파괴의 감정은 사람한테 에너지를 주기도 하지만, 사람을 파멸에 이끌 수도 있다는 거.”
- 충동에 맞서기 중에서 (p150~157)
“미안해.”
“아니, 내가 미안하구나. 끝까지 널 도울 수 없어서. ……너, 괜찮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감정을 꾹꾹 밀어 넣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이지. 내가 누구냐.”
“그래, 넌 똑똑하니까. 단추처럼 반짝반짝하는 아이잖아.”
“그 놈의 단추타령은 여전하구나.”
“색깔이 바뀌는 단추. 어떤 색으로 달라지느냐는 너한테 달린 단추.”
“…….”
그리곤 긴 침묵. 바람이 떠밀기라도 한 듯 그림자가 희미하게 휘청거렸다.
“우리…… 다시 보게 될까?”
“아마. 아닐걸. 다시 안 만나는 게 좋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건 그래.’
헤어지는 절차는 간단할수록 좋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어서 가!”
이를 악물고 돌아보지 않았다. 눈물이 나려 해 하늘을 보았다. 만났다가 흩어지고 만났다간 흩어지는 하얀 구름들이 오색 무지개로 반짝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니 잔디 풀들이 제 색깔로 돌아와 있었다.
“가버렸구나, 흑문도령. ……나,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약속할게.”
- 떠나보내기 중에서 (p166)
“원하던 가수가 되지 못했는데 후회는 없나요?”
……“한때 그랬지만 이젠 아니야. 인생에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거든. 돌아가는 길도 있고. 샛길도 있고. 무엇보다 선생을 하게 된 덕에 너희를 만났잖니. 나도 중학생이었던 어른이거든. 너희한테서는 중학생 시절의 내가 보여서 좋아. 한 가지 더! 내 애인은 음악선생이라는 내 직업을 무지 좋아하거든.”
……“다른 직업을 가졌다고 꿈을 포기한 건 아니야. 내 취미이자 특기이자 전공은 여전히 노래와 작곡이란다. 고1때부터 틈틈이 만든 곡이 30여 곡 돼. 노래도 있고, 기타 연주곡도 있고. 시디에 담아 라미 씨 생일날 선물할 거야. 가수가 되지 못했어도 이런 행복을 누릴 수가 있지. 모든 예술이 그렇겠지만 음악은 사랑이거든.”
- 벌어지는 틈새 중에서 (p186~187)
“처음엔 흑문도령, 그 담엔 라미씨 애인, 이번엔 저 녀석……. 나더러 완수 형을 돕듯 저 애를 도우라는 건가? 완수 형 친구는 떠나 버렸다던데, 나는 언제나 곁에 남아 있으라고?”
……“안 그래도 네가 날 힐끔거리는 거 알고 있어.”
“네 말대로 그동안 널 지켜봤어. 혹시 너한테도 누군가 찾아올지 모른다 싶어서. 아니면 벌써 왔는지도.”
“……나한테도 그게 찾아왔고 그때부터 내 안에는 엄청난 힘이 생겨났지. 한동안 그 마력에 취해 휘둘렸고. 그런데 이젠 알았어. 그 마력을 다스리고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나 자신이라는 거. 내 자유의지라는 거.”
“도대체 뭔 소린지……. 그래서? 네가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도 겪어 봤는데 폭력은…… 때리고 부수고 괴롭히는 걸로는 아무 해결도 되지 않더라는 거지. 그러니까 네 기를…… 분노나 파괴로 치닫는 네 에너지를, 네가 잘 다스렸으면 해서…….”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랑 너는 친구가 될 거 같아! 아주 친한 친구!”
- 생성의 기 파괴의 기 중에서 (p234~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