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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다, 홀딱

반하다, 홀딱

: 22세기 시인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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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1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95쪽 | 127*205*15mm
ISBN13 9791195556236
ISBN10 1195556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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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말라비틀어진 붓꽃에 벌이 절반쯤 몸 숨기고 있다
한 생이 또 다른 생으로 건너가는 순간을 다정이라 하자
다정해지고 싶다 다정하고 다정하고
또 다정해지고 싶다 다정이 독毒이라지만
한없이 다정해지고 싶다 그러니
초원아, 사막아, 바람아 제발
나를 비껴가다오
초원과 초원 사이를 서성이다가
결국 너를 놓쳐버렸다
흐르고 흘러 사막에 몸 기댄 그날 밤
텅 빈 사막 울음소리 베고
나는 다정하고 다정하게 울고 말았다


아홉차리

무슨 연유로
초원은 흐르면서 펼쳐지는가
숲은 제 살 찢어 몸피를 키우는가
꽃잎은 제 얼굴을 감싸며 사라지는가
벚나무 둥치 갸우뚱 낡은 우편함
꽃비에 팽그르 젖는 안부
온 힘 다해 남은 계절 밀어 올리는
저 늙은 어머니
아홉 바구니 나물을 캐고
아홉 자식 낳은 후
아홉 말의 진물 흘리며 누워있다
나는 모르는 당신과 아홉 번 키스를 하고
아홉 번 결별을 하고
아홉 개 가면을 쓴 후
노란 눈 박힌 슬픔의 숲 속으로
아홉 리, 긴 휘파람새 따라 간다


마, 살

몽골 사람들은 바람에도 색깔이 있다고 말한다 저물 무렵, 고
비의 바람은 하얀 바람 사막에 조심스럽게 당신을 그려 본다
훅, 바람 불자 당신은 슬그머니 지워진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고 처음 들은 날,
산양자리인 나는 이상하게도
심장이 평소보다 쿵쿵 크게 울렸다
이 복된 저주
평생 길 위를 방황하며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골에서 최고의 욕은
평생 한 곳에서만 살아라
정착은 곧 죽음을 말한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 이렇게 말했다지,
나를 매장한 뒤, 천 마리 말을 몰고 무덤 위를 달려 흔적을 없
애라
지금도 칭기즈칸의 무덤은 찾을 수 없고
누군가는 무덤을 찾아 지금도 떠돌고 있다

난로에는 시베리아 낙엽송이 자작자작 타들어가고 있다 낮에
는 숲을 걷다가 마른 자작나무 둥치를 주웠다 먼먼 사람들이 자
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새기듯, 껍질을 벗겨내어
당신의 안부를 새긴다 글자에도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지 허나,
열흘이면 당신이 있는 곳까지 가고도 남을 그때의 안부는 한 계
절이 지나도 당신에게 가 닿지 못했다 얼마나 더 먼 곳으로 가
야 나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까


태백

눈설레 속,
자작나무도 말이 없다
침묵이 모든 산을 얼리고 있다
어둠의 깊이만큼
너는 차갑고
너의 창으로 들여다보는 풍경
마침내 자작나무를 듣는다
간신히 버티는 수직의 흰 불꽃
자작나무는 어둠을 견디고 있다
초조해 마, 겨울나무를 자르면 다홍빛 심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른 생으로 옮겨가는 자작나무
태백太白에 갇혀
하염없이 자신을 울리고 있다


*고오자이 테루오(1917~1987)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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