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얼굴은 애초에 없는 것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어 보였다. 어떤 사람은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는 기억조차 깡그리 없애버리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을 것이고, 그건 돌아오지 않는 가족처럼 언제까지나 텅 빈 채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주 그 텅 빈 공간에 머무는 것 같기도 했다. 우두커니, 아니다. 어쩌면 그 공간은 이미 찌그러졌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퍼즐 조각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며 찾는 수고를 유보하고 또 유보하는 게 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평생 아버지를 이해할 듯 말 듯, 무언가 부채의식 같기도 하고 원망 같기도 한 것들을 남긴 o 눈을 감는 게 남자들이다. 한국의 가정에서 아들이란 아버지를 도와주는 존재가 아니다. 그냥 덮어두는 존재일 뿐이다.
나는 이처럼 나 자신을 고독한 상태에 놓이게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를 향한 복수인지, 다른 누구를 향한 복수인지는 모른다. 나는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편을 택한다. 별 볼 일 없는 인간이 안간힘 끝에 내리꽂는 복수는 이런 형태로 귀결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다.
‘쿨Cool’함이 세상의 미덕처럼 여겨지게 된 이후 온갖 종류의 관계 사이에 이 쿨함이 횡행한다. 누구나가 그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질이’가 될 혐의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는 분명 인간관계에 대한 강박신경증을 유행시키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무엇이 쿨함이고 무엇이 지질함인지의 이분법조차 분불명해지는 신경증적인 감정의 문제라는 데 있다. ‘지질함’이 분명 자기가 받을 상처 때문에 차라리 관계를 파탄시키는 자기 방어적 심리의 소산이라면, 쿨함은 지질함의 반대 감정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는 지질함으로 나가기 한발 직전에 스스로를 통제하는 멈춤의 형식인 탓이다. 쿨함은 결국 감정의 소비와 그에 따른 이윤을 생각하는, 자기 감정에 대한 객관적 태도이다. 이와 같은 감정의 실리적 사용을 감정 자본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금 우리 시대 모든 관계의 역학이란 감정 경제학으로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균형의 세계다. 쿨함이 감정 절약의 경제적 태도라면, 지질함은 감정의 낭비나 누수,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파산의 한 양태이므로 이 감정 자본의 세계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자는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나마 이런 요약이 가능하다면, 방현희의 장편소설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복수』(이하 『사소한 복수』)는 바로 이러한 감정 경제학에 사로잡힌 한 남성의 감정적 파산과 그에 따른 복수를 그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