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여 동안 ‘칸트의 미학’이라는 미로 속을 헤매며 보냈다. 미로는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넓고 길게 펼쳐져 있었고, 그래서 내가 이리저리 허둥대며 헤집고 다닌 곳은 미로의 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연구서는 이 미로 속에서의 내 방황의 기록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내가 무슨 대단한 미학 연구가나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칸트 전문가는 더더욱 아니고, 그저 한 명의 독문학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칸트 미학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루려고 무모하게 덤벼든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연구서의 원래 의도는 괴테-쉴러-하이네로 연결되는 독문학사상의 비판적 시학과 예술론을 조망해보려는 것이었다. 비판은 항시 대상에 대한 일정한 거리 두기를 전제로 한다. 이 거리가 없으면 대상을 객관적이며 냉철한 시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괴테, 특히 그의 『파우스트』의 구조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상호 해체(Dekonstruktion)의 기법, 쉴러가 내세운 비극적 드라마의 서사화(敍事化. Episisierung) 요구, 그리고 후기 하이네의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us)의 예술론은 모두 이 ‘거리 두기 미학’의 구현 형태이다. 내가 칸트의 미학에서 찾아보려 한 것은 단지 이런 예술론들의 미학적 근거와 출발점이었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개진한,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근거로서의 ‘관심 없는 만족’과 ‘목적 없는 합목적성’론이 모두 ‘미’를 ‘진’과 ‘선’에서 분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렇게 성립된 아름다움의 자율성은 어떠한 외적 목적도 추구하지 않으며, 어떠한 목적론적 관심에서도 자유로운 자율적 예술론의 미학적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대상에서 분리된, 즉 현실에 대한 거리 두기가 가능한 자율적 예술은 그 거리로 인해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원래의 목적을 접어두고 칸트의 미학만을 다루게 된 사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거리 두기 미학의 이론적 토대로서 짧고 간단하게 요약하기에는 칸트의 아름다움 규정은 이론적으로 아주 복잡하고 심층적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참조하려고 접해본 국내의 칸트 미학 연구가 나에게 너무 생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사용된 한자 용어는 무척 어려웠고, 우리말 표현은 대체로 무척 생경스러웠다. 물론 내가 찾아본 얼마 안 되는 연구서와 논문 그리고 번역물을 근거로 국내의 칸트 미학 연구를 일률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읽어본 두어 본의 『판단력 비판』 번역서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부분적으로는 칸트의 독일어 원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웠고, 찾아본 몇 권의 연구서와 논문은 독일의 칸트 연구자의 글보다 더 읽기 어려웠다. 국내의 칸트 미학 연구는 일반인이 근접하기 어려운 전문 학자만의 폐쇄된 영역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학 학부생 수준의 철학적 상식을 가진 비전문가도 읽을 수 있는 칸트 미학 연구서를 써보자는 것이었고, 이 시도의 결실로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앞에서 밝힌 대로 나는 철학자나 칸트 전문가가 아니다. 그러니 칸트 미학 연구에서 나는 그저 한 명의 아마추어적 국외자일 것이다. 나는 이 국외자적 위치가 가질 수 있는 장점, 즉 전문용어를 사용하고 서술하는 데서 전통적인 연구의 엄격한 규범과 틀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장점을 십분 활용하려 했다. 예를 들면, 국내의 칸트 미학 연구에서 거의 획일적으로 사용되는, 그러나 일반인에게는 무언가 낯선 느낌을 주는 용어인 “쾌”(원문 “Lust”)를 그때그때의 문체적 상황에 따라 “즐거움”, “유쾌함” 또는 “쾌감”으로 바꿔 보았다. 그래서 “쾌를 느끼다” 같은 생경한 표현을 “즐거움을 느끼다”, “쾌감을 느끼다” 같은 일상적인 말로 대신했다. 원문의 Vorstellung과 vorstellen은 무조건 “표상”, “표상하다”가 아니라 때로는 “상정”, “상정하다” 등으로 번역했다. 그리고 “인식 일반”(원문 “Erkenntnis uberhaupt”)이라는 용어가 지나치게 모호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본래적 인식”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집필을 완료한 지금 원고를 검토해보니, 내 글 역시 결코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느낀다. 그래도 이 난해한 칸트의 미학을 조금이라도 쉽게 풀어썼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