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핑촌은 강변 마을이었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두만강 건너 북한 무산읍 칠성리 마을이 손에 잡힐 듯했다. 난핑촌의 개가 짖으면 칠성리의 개들도 따라서 짖었고, 칠성리에서 사람들의 갑작스런 웃음소리가 들려오면 난핑촌 노인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강 너머를 건너다보곤 했다. --- p.136
탈북자들은 이삼 일에 한 번 꼴로 강을 건너 난핑촌으로 넘어왔다. 때로는 여자 혼자 건너오기도 했고 일가친척이 한꺼번에 넘어오기도 했다. 마을을 그냥 스쳐 지나간 탈북자들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그해 겨울과 봄 사이에 난핑촌으로 숨어들어왔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만났다. --- p.137
브로커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두만강에도 여름이 무르익고 녹음이 울창하던 8월 11일, 나는 더 이상 난핑촌에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8월 11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컥컥 막혔던 것이다. 림채하와 헤어지던 날, 그 뒤로 벌써 세 번째 맞이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그날, 쑥대처럼 우북하던 머리를 잘랐다. 그러고는 류 씨 아저씨에게도 비밀로 한 채, 홀로 두만강을 건넜다.
소설 속의 사랑은 절박하고, 독후(讀後)의 느낌은 절통하다. 사랑하는 남자의 유골을 자기 알몸에 뿌리며 물약처럼 가루약처럼 어서 스며들라고 애원하는 여자의 절규에 소름 끼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불과 오십 미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손을 들어 헤어지는 비극에 눈물 훔치지 않을 사람이 또 있을까? 백산서와 림채하의 사랑은 우리가 일찍이 상상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서럽다. 그럴 것이다. 아마도 우리 시대의 사랑은 분명 서러워야만 할 것이다. 만약 우리 문학이 『북쪽 녀자』를 얻지 못했다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남녀 간의 사랑이 한낱 영혼 없는 섹스로 치부됐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이십일세기 한반도 위의 모든 사랑을 옹호하고 미화시키는 역설적인 힘을 안겨준다. - 안도현 (시인)
작년 겨울 전주 시내에서 이병천 작가를 만나 가맥을 마시던 밤, 형님은 날이 밝는 대로 진안 산골로 소설을 쓰러 떠나간다고 했다. 그게 바로 이 작품 『북쪽 녀자』다. 탄식하면서, 숨죽이며, 울며, 울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의 문장 전체를 꼼꼼하게 아껴 읽었다. 문득 함박눈이 기다려진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 소설을 읽으며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 옮길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극영화 감독이라면 영화로 만들자고 형님을 졸랐을 텐데, 하지만 나는 다큐멘터리스트! 아깝고 부럽다. 아, 나도 북쪽 여자를 만나 소설 『북쪽 녀자』같은 다큐멘터리 한 편 그대에게 안겨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