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소리 흉내를 내는
명창(?) 노정의 호남가를 듣는다
장단은 젓가락 장단
악기는 빈 병과 빈 그릇
그 생이지지했다는 장단 솜씨에
절로 어깨춤이 흥겹다
잡놈은 아무나 하나
그 명예 가객노릇 그리 쉬운가
구수한 백발 탄식 사철가를 듣다가
만만한 율포 전어회 소주가 달다
의리 고운 보성이
뱃속에 화안이 짜르르하다
소주 한 병 못 마시는 놈
연애 한 번 못 해본 놈
줄줄이 묶어놓고
염왕전 고발하여 곤장을 치리라
노정의 사설에 소줏병이 까르르 나동그라진다
술상머리 앉아서 남의 흉보는 놈
정과 의리 없고 입만 동동 살아있는 놈
소주 한 잔 더 먹여 구린입 막아놓고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퉁타당 퉁탕 퉁타당 퉁탕
신선선녀 어울려 깊어가는 밤
이 세상 소주가 마르고 닳도록
샛별처럼 빛나라 노정의 의리여
잔 가득 넘치라 보성의 인정이여
이 누리 다하는 그날까지 퉁타당 퉁탕!
-문병란, 「파한(破閑)-노정의 의리와 우정에 부쳐」
노정(蘆汀) 손광은 시인이 문단에 나와 시를 쓰기 시작한 지는 벌써 50년이 넘었다. 50년 지기 문병란 선생이 「파한」에서 설파한 대로 노정 선생은 천성이 소박하고 흥겨운 분이다. 소리를 좋아해서, 그리고 그의 시세계에서도 소리의 모티프와 이미지가 지배적이라서 노정은 ‘천성(千聲)의 시인’이라는 칭함을 얻었다. 1962년부터 내리 3년간 「제3광장」, 「산책」, 「나의 반란」이 김현승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상재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1966년 「영도」 제3집부터 이성부, 김현, 최하림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하고, 이듬해에는 문병란, 박홍원, 범대순, 문도채 등과 [원탁문학회]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그간 상재된 시집은 모두 6권이다. 제1시집 「파도의 말」(현대문학사, 1972)은 김현승 시인이 서문을 쓰고, 김현 선생과 이성부 시인이 발문을 썼으며, 오승윤 화백이 표지장정을 맡았다. 제2시집 「고향 앞에 서서」 (문학세계사, 1996)는 오랫동안 시작(詩作) 생활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고향을 노래하였는데 김병욱 선생이 해설을 썼다. 제3시집 「그림자의 빛깔」(시와사람사, 2001)은 삶의 빛과 어둠에서 작동하고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장구치고 북치고 하늘치고 북치듯’ 음악적 영상 이미지로 구체화하였는데 여기에 문병란 선생이 발문을 썼다. 제4시집 「내 마음속에 눈부신 당신」(한림, 2006)은 사랑의 설렘과 상실의 비애를 삶의 지평으로 확대해가는 시편들이고 여기에 김동근 교수가 발문을 달았다. 제5시집 「땅을 딛고 해가 뜬다」(한림, 2007)는 전남 광주 지역에 산재해 있는 금석문들과 시화전의 시들, 그리고 헌시와 기행시들이 묶여 있는데 여기에 문병란 선생이 평설을 달았다. 마지막 제6시집 「민속의 숨결 신명을 풀어라」(한림, 2010)는 우리의 전통 민속을 시로 승화한 것으로 여기에 이성부 시인과 김병욱 교수가 평설을 썼다. 시력 50년 동안 6권 시집을 냈다면 결코 다작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그의 시세계는 매우 다채롭다. 시인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성찰과 삶의 실존적 선택에서의 존재에 대한 탐구가 주류를 이루다가 해남 땅끝의 땅끝탑을 필두로 보성 율포 봇재의 애향탑, 광주 중외공원의 88올림픽탑, 강산제 판소리 예적비 등 수많은 금석문에서 전통과 고향의 문화적 유산을 기렸으며, 남도의 다채로운 민속을 아름다운 언어의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노정은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교수로 재직했다. 선생이 교육자로서 남기고 간 인간적 풍모와 인품이 후학들에게 큰 자산이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선생의 학덕과 시적 성취를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전남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에서는 「어문논총」 제26호(2014. 12) 특집으로 ‘손광은의 시세계’를 다루었다. 유성호 교수는 손광은의 시세계 전체를 「전통적 원형과 존재론적 기원의 발견」이라는 논제로 깊이 있게 탐구하고, 필자는 제1시집 「파도의 말」을 중심으로 「물의 형상성과 건강한 생명력」을 밝히고, 정경운 교수는 제5시집 「땅을 딛고 해가 뜬다」를 중심으로 금석문이나 기행시를 「기억의 시학」으로 풀어냈으며, 나경수 교수는 제6시집 「민속의 숨결 신명을 풀어라」를 중심으로 「노정 손광은의 남도기행 시집의 민속학적 의의」를 밝혔다.
전남대학교 한국어문학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이번 총서는 지역문학과 문화를 활성화하고 체계화하기 위한 시도로 구상되었다. 「손광은의 시와 시세계」로 제목을 정한 이 책의 편제는 「어문논총」 제26호에 실린 논문을 중심으로 하되 이동순 교수가 시인론으로 새롭게 쓴 「향토와 민속, 남도정신의 아카이브-시인 손광은의 문학적 생애」를 보태고, 기존에 쓰였던 좋은 글들을 재수록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말미에 선생의 대표시를 시집별로 골라 실었다.
아직도 많이 미흡하지만 이 책이 광주 전남의 지역문학을 활성화하고 지역문학사의 연구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옥고를 집필해주신 필자들과 재수록을 허락해주신 것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려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린다. 또한 예쁜 책으로 꾸며주신 태학사 지현구 사장님을 비롯하여 편집부 식구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