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성장하여 사춘기가 되고 중학생이 되고, 각자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회 활동을 하다 보니 함께하는 시간이 줄고 대화의 시간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마음이 좋지 않았던 건 우리 아이들이 하늘 한번 올려다볼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하고 시작했습니다. 학교나 학원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벗어나 산, 들, 바다가 있는 곳을 함께 다니며 아이들에게 ‘쉼’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거든요. 책상, 의자, 책, 노트, 연필이라는 딱딱한 물건보다는 전원 속에서 나무, 꽃, 풀, 바람, 흙 등이 살아 숨 쉬는 자연을 보고 느끼며 살 수 있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또한 빡빡한 세상 속에서 고된 삶을 사느라 지치고 힘든 제 영혼에게도 ‘쉼’이라는 선물을 주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이들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제 자신이 더 원하고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시작해 보자’ 하는 마음으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여간의 주말여행을 시작했습니다.
--- 「프롤로그」중에서
「그렇게 자연 속을 걸으며 우리는 각자 자연을 담아내기 시작한다. 습한 날씨 때문인지 흙냄새, 풀냄새, 나무냄새 등 자연의 향이 진하게 코끝으로 스며든다. 그 향을 놓칠세라 우리는 평소에 맡을 수 없는 향기, 몸이 저절로 건강해지는 향기라며 온몸에 수목원의 향기를 양껏 주입시킨다. 연못에 핀 연꽃과 물옥잠, 어릴 적 보았던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와 파란색 잠자리, 풀숲에 피어난 버섯, 가지런히 핀 허브 꽃밭과 들꽃들이 우리들의 눈을 호강시켜 준다. 평소에는 보지 못하는, 구경하기 힘든 것들이다 보니 두 남매가 오늘 여러 가지로 눈이 호강한다. 특히 현태는 파란색 몸을 한 잠자리를 보고는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 p.26
「아기 살결처럼 보드라운 모래 위에 그림도 그려 보고 모래성도 쌓아 본다. 물 위로 둥둥 떠다니는 해초도 건져 보고, 현무암 바위 틈새로 돌아다니는 생물도 잡는다. 행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걱정거리와 시름에서 벗어난 지금 이 순간, 아름다운 곳에서 자연을 누리고 온몸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냥 행복하다. 다른 생각은 잊고 온전히 이 시간, 내게 주어진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누려 본다.」
--- p.86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이용해 원주에 위치한 한스캠핑장으로 향했다. 한산한 도로를 달리며 차창 밖 세상을 내다본다. 시월의 중턱에 있는 가을은 한없이 예쁘기만 하다. 샛노랗게 익어 가는 황금 들녘과 중간중간 이미 추수를 끝낸 논도 한 폭의 그림이다. 사과나무에 탐스럽게 익어 가는 빨간 사과와 바람에 흔들리는 도로변 억새는 나의 시선을 자꾸만 붙잡는다. 어느새 눈앞에 펼쳐진 산은 노랑, 주황, 빨강 단풍이 시작되고 있다.
떠나고 싶을 때 가방 하나 둘러메고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요즘 실감한다.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더라면 볼 수도,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계절에 순응하며 자연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또 그 자연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여행을 통해 참 많이 생각하고 배운다.」
--- p.121
「12월의 첫날, 하얀 눈이 소복이 내려앉았다. 올겨울의 첫눈이다. 첫눈을 보니 홀연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직장인이다 보니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서 때로는 ‘떠남’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힘이 들 때도 있다. 순간의 감정에 몰입할 수는 없다 해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 어느 때면 어떤가. 그 마음 잠시 가라앉혔다가 주말에 떠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으리라.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번 주말에는 꼭 겨울 바다 보러 강릉 가자!’ 하며 다짐해 본다.」
--- p.167
「은아가 마을 입구에 보이는 복덕방을 보더니 문득 궁금했나 보다.
“엄마, 복덕방이 뭐하는 곳이에요? 서로서로 복과 덕을 주고받는 방인가?”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복덕방이라는 말 대신 부동산이라는 말이 사용되다 보니 지금의 아이들은 복덕방이라는 말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은아에게 복덕방이 뭐하는 곳인지 알려 주니 복덕방이라는 말이 더 정감 있어 보인다고 한다.」
--- p.177
「집, 학교, 학원이라는 굴레 안에서 늘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고 있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늘 안쓰럽다. 한창 많은 것을 보고, 뛰어놀며 몸으로 느끼고, 배우고, 깨우칠 나이에 어른들의 욕심 때문에 ‘경쟁’이라는 굴레에 갇혀 버린 우리 아이들. ‘내 아이들만큼은 그렇게 키우지 말자!’ 하면서도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대한민국 엄마인가 보다.
미안한 마음에 현태가 원하는 만큼의 시간 동안 좀 더 머무르기로 한다. 물수제비뜨기에 한참 집중하는가 싶더니 ‘퐁, 퐁, 퐁, 퐁 ,퐁’ 다섯 번을 튕긴다. 현태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 p.242
「곧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땅속에서는 뾰족이 죽순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처음 걷는 대나무 숲도 가슴 설레지만 올라오는 죽순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가슴 떨리는 설렘이다. 모든 게 처음인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 모두가 마냥 신비롭고 신기하기만 하다. 한창 죽순이 올라오는 시기라고 하더니만 이렇게 많은 죽순을 보게 될 줄이야. 사람들이 오가는 길 한가운데 뾰족이 솟아난 죽순이 나의 발길을 붙든다. 가던 길을 멈추고 죽순 앞에 쪼그리고 앉아 이리저리 죽순을 어루만져 보고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도 본다. 언제까지 그 자리에서 다치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기를 바란다.」
---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