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이 아닌 할머니에게서 처음 이야기를 배운 사람이다. 불 꺼진 어두운 방에 누워, 조곤조곤 할머니가 해주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그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씨앗이 되어 몸속에서 폭죽처럼 발아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로, 거기에서 다시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로 변모한다는 사실. 이효석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배운 것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말하지 않으면서, 더 많은 말을 하는 것,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이야기로 세포 분열처럼 퍼져 나가는 힘. 그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 p.346, 이기호 수상소감 중에서
나는 시동을 건 채, 한참 동안 차 내부를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핸들을 살짝 잡아보았다. 핸들은 길이 잘 든 듯 너무 뻑뻑하지도, 또 너무 헐겁지도 않았다. 나는 핸들을 잡은 상태에서 숨을 한번 길게 내쉬었다. 여러 가지 가정 중 하나의 가정은 확실해진 것 같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삼촌은 이제 이 프라이드와 영영 이별을 해버린 것만 같았다. 그냥 나도 모르게 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브레이크 페달에서 발을 떼, 액셀 페달 위에 올려놓았다. 차는 아무 이상 없이 천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나는 삼촌에 대한 생각은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직 초보딱지를 떼지 못한 처지여서 그랬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관성 같은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가정을 진실로 만들어버리는 관성 같은 것.
하지만, 그런 상태는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그날 밤, 나는 삼촌의 프라이드의 어떤 결함에 대해서 곧장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삼촌의 프라이드는, 삼촌의 프라이드는…… 후진이 되질 않았다. --- pp.21-22,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 중에서
“길상아!”
용구는 분명, 길상이, 라고 했다. 그러자 좀 전, 나를 안내했던 와이셔츠 청년이 쟁반 두 개를 겹쳐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저 친구 이름이…… 길상이야?”
나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상 위에 양주와, 생수와, 얼음과, 과일안주를 올려놓는 청년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용구에게 물었다.
“어, 우리집 3번 웨이터 길상이. 왜, 이상해?”
용구는 큰 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아니, 그냥 좀……”
그냥 좀, 그래선 안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길상이는 좀……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야, 뭐 우리집에 길상이만 있는 줄 아냐?”
용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호출벨을 두 번 연속 눌렀다. 그러자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한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서희라고 합니다.”
옥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쪽머리까지 한 여자가, 방문 바로 앞에 서서 나에게 큰절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 p.69, 「원주통신」 중에서
―내가 을마 전에, 밴, 희봉 선생을 만났다 아이가.
오랜만에 만난 내 친구 만기가 말했다. 동대문운동장역 근처의 포장마차에서였다. 얼마 전에 이혼한 이야기, 병석에 누워 있다 타계한 부친 이야기 끝에 꺼낸 말이었다. 말하자면 녀석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가을이었고, 밖에는 점점이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기도 뭣하고 쓰지 않기도 뭣한 비였다.
―밴…… 뭐?
―밴, 희봉 선생이라 안 카드나.
―밴……희봉? 기 누고?
―그칼 줄 알았다. 밴희봉 선생은……
―선생은?
―배우다.
나는 멀뚱히 만기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우짜라꼬?
―마, 니보고 우짜라 카는 건 아이고,
만기는 힘없이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괄괄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한구석이 비어 있는 어조였다. 억양이 강한 듯하지만 끝물에 쓸쓸한 맛을 남기는 어조랄까. 이혼한 아내를 얘기할 때도 그랬고, 세상을 뜬 부친을 얘기할 때도 그랬다. 애초에 무슨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라는 투였다. 구석의 소형 텔레비전에 가 있는 녀석의 시선이 조금 풀려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야구경기가 진행중이었다. 롯데와 SK의 경기, 1대 1 동점, 7회 말. 빗방울이 타자의 헬멧에 맺혀 있는 게 클로즈업으로 보였다. 빗방울은 굴러떨어질 듯 말 듯 헬멧에 매달려 있었다.
--- pp.180-181, 「변희봉」 중에서